"아무도 모르게 살해돼 암매장될 것 같은 공포 떨칠 수 없었죠"

      2022.05.21 10:01   수정 : 2022.05.21 10:01기사원문
20일 광주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상집씨(66)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김씨는 5·18 때 녹두서점에서 상황일지를 기록했다. 2022.5.21/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20일 광주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상집씨(66)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김씨는 5·18 때 녹두서점에서 상황일지를 기록했다. 2022.5.21/뉴스1 © News1 이수민 기자


20일 오후 광주 동구 옛 녹두서점 터 맞은 편에 설치된 조형물의 모습. (독자 제공) 2022.5.21/뉴스1 © News1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거실과 서재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집안 곳곳에 책이 쌓여있다. 사방이 서가다.

희고 긴 수염에 덥수룩한 머리, 취기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김상집씨(66)가 방 한 쪽에 앉았다.

김씨는 광주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인사다.

80년 5월 항쟁과 이후 40여 년간 광주 시민사회 진영의 중심에 있었던 역사의 산증인이다.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했고 광주 동구 장덕로터리에 있던 '녹두서점'에서 5·18 상황일지를 기록했다.

녹두서점은 5·18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김씨의 친형 상윤씨가 1977년 문을 연 사회과학서점으로 당시 금서인 책들을 학생과 시민들에게 보급했던 곳이다.

20일 광주 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김씨. 익숙하게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곤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였다. 뿌연 담배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울 때쯤 김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5월은 제게 운명이었어요."

80년 5월1일 김씨는 대구 와룡산 산기슭에 있는 506 항공대에서 3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506 항공대는 5·18 당시 시민들에게 공중사격을 한 500MD 헬리콥터 부대다.

그는 제대 후 일주일도 되지 않은 6일 전남방직에 취업했다. 김씨가 맡은 업무는 기계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18일 새벽 5시쯤, 김씨는 이른 시각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가 보니 들불야학 강학인 윤상원 선배가 있었다.

윤씨는 "네 큰형 김상집이 어젯밤 12시쯤 녹두서점에서 예비검속돼 합동수사부로 잡혀갔다"며 "빨리 나와 형 대신 서점을 지키며 이곳저곳 연락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비상계엄이 제주를 비롯해 전국으로 확대됐고 '위험인물'을 잡아가는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다.

"큰형이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두렵기보다는 '올 것이 왔구나' 싶었어요. 서점에 가니 형수인 정현애를 비롯해 예비검속 당한 선배들의 형수들이 모여 있었죠."

김씨는 그때부터 형 대신 녹두서점을 지키게 됐다. 동이 트자 곳곳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전 9시 전남대 입구에서 시위하던 200여명의 학생을 향해 착검한 공수부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무자비하게 찌르고, 곤봉으로 두들겨 팼다는 연락이 왔다.

김씨는 윤상원과 만나 시위대에 합류해 전남대와 구 시청 사거리, 동명파출소 등지에서 화염병을 들고 '비상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 '전두환 타도'를 외쳤다.

윤상원은 김씨에게 "시민들에게 상황을 알릴 수 있는 소식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항쟁 기간 첫 소식지인 '투사회보'다. 김씨는 그때부터 '투사회보'에 담을 내용을 정리했다.

또 전화번호부 책을 뒤져 전국 곳곳의 사람들에게 광주 상황을 알렸다. 서점에 있는 책의 출판사에도 전화를 걸어 상황판을 낭독하고 광주 소식을 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투쟁하면 금방 변할 줄 알았죠. 더 큰 희생이 필요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눈물을 뿌리치고…."

5월20일, 상황일지를 정리하던 김씨를 데리러 아버지가 직접 서점에 왔다.

아버지는 "서점은 이미 군인들에게 특정이 된 장소라 위험하다. 산수동에 있는 집으로 가자"며 "네 형도 잡혀간 마당에 너까지 무슨 일 생기면 아비는 어찌 살란 말이냐"고 눈물로 애원했다.

하지만 김씨는 들은 척조차 하지 않고 제 일에만 집중했다.

"아버지의 눈물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윤상원 선배에게 '투사회보' 초안을 전달할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때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달려 나왔죠."

이후 김씨는 며칠간 시위대에서 일했다. 나눠 받은 총을 들고 시민군으로 학동 일대를 순찰하고 방송 기계를 넣어 개조한 전남대 스쿨버스를 타고 가두방송도 했다. 시위 현장에서도 늘 남들보다 앞장서 주도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잡혀가고 죽을지 알 수 없었고, 특히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람들과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했던 이들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5·18 내내 아무도 모르게 살해돼 암매장 당할 것 같은 공포를 떨칠 수 없었어요. 녹두서점은 공개된 공간이고, 온갖 기관원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밤이 되면 계엄군이 혹시나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웠고, 날이 새면 어제 본 동지들이 혹시라도 오지 못할까 마음 졸였죠."

26일 밤이었다. 김씨도 금남로에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로에는 총알이 핑핑 튕겼다. 그때 형수 정현애씨가 나타나 그의 손목을 끌었다.

정씨는 "상집씨가 아버지를 뿌리치고 서점을 떠난 후 아버지께서 며칠간 울고 계신다"며 "'상집이를 꼭 챙기라고 당부하셨다. 여기 있다간 다 죽겠으니 서점으로 가자"고 했다.

녹두서점에 가까스로 도착하니, 그곳에 쌓여있는 서류들이 더 문제였다. 만에 하나 계엄군이 서점에 들이닥치고 그동안 만든 투사회보와 대자보, 상황일지 등이 발견되면 어찌 될 지 모를 일이었다.

김씨는 형수와 함께 서류들을 전부 서점 뒤채에 있는 아궁이에 넣고 태웠다.

27일 새벽이 밝았다. "손들어!" 갑자기 서점 문이 열리더니 문 사이로 총구가 튀어나왔다. 계엄군이었다. 서점 안에 있던 사람들은 포로가 돼 안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군인들은 허리띠와 신발을 벗긴 뒤 굴비처럼 줄줄이 포승을 묶었다.

"묶여서 끌려가는데 옆에 방송 카메라가 따라왔어요. 매년 5·18이 되면 KBS에 나오는 화면인데, 그때 전 제 얼굴이 어떻게든 찍히길 바랐어요. 혹시 시체는 못 찾더라도, 아버지가 내가 어떻게 죽은 줄은 알아야 하니까…."

군인들은 잡혀 온 사람 중 주요 인물을 몇몇 분리해 등에 '극렬분자', '총기 휴대'라고 적었다.

"서점에서 잡혀서 총을 휴대한 적도 없는데 황당할 노릇이었죠.

김씨는 시청 지하실로 끌려갔다. '원산폭격'을 당하고 두들겨 맞고, 쓰러지면 또 맞고, 계속 폭력이 이어졌다. 가슴과 배, 팔과 다리를 연타 당하면서 초주검이 됐다.

이후에는 상무대로 끌려가 5개월간 영창에 갇혔다. 그곳에서도 고문과 폭행은 계속됐다. 10월29일 도청사수대와 녹두서점 관련자는 모두 광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김씨는 7년 구형을 받은 뒤 2년을 선고받았다.

"하도 폭행을 당하니 온몸이 곪아 터졌어요. 어느 정도냐면 재판받을 때 의자에 앉아있는데 바닥에 핏물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어요. 여전히 왼쪽 발은 제대로 못 딛어요."

81년 4월3일, 김씨는 대법원판결로 형이 확정되자마자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그는 출소 때 아버지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했다.

"저희 집은 큰형과 형수, 형수의 여동생, 저, 여동생, 여동생의 남편까지 총 6명이 감옥에 갔어요. 아버지 입장에선 며느리까지 싸그리 온 가족이 잡혀 들어간 거죠. 아버지는 저를 보자마자 '죽어분 사람도 많은디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했어요."

출소했지만 김씨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치열했던 5·18 현장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보니 5월18일 이전의 자료와 27일 이후의 자료는 많은데 항쟁 기간의 상황이 정리된 것은 없었다.

김씨는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새로 정리했다. 후일 이 자료는 1985년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주요한 재료가 됐다.

직접 책도 펴냈다. 형 상윤씨, 형수 정현애씨와 함께 '녹두서점의 오월'이라는 책을 발간했고 시민군 대변인이자 그를 5·18에 휘말리게 한 선배 윤상원의 삶을 담은 '윤상원 평전'도 냈다.

"5·18이 왜곡·폄훼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특히 우리는 일가족 모두가 광주의 5월과 연결돼 있어 가족의 숙원 사업으로 느껴지기도 했죠."

1990년 국가에서 5·18 피해자들을 위해 보상금을 지급했다. 김씨는 무릎 장애와 구금일 등을 토대로 13급을 받았지만 정확한 보상 액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김씨는 받은 돈을 전부 '운동하는 데' 썼다며 80년 5월 '그날' 이후로 자신 개인의 삶은 사라져 버렸다고 털어놨다.

"죽은 동지들이 있잖아요. 사는 동안 그 사람들을 지울 수 없는 거예요. 내가 살아남은 기쁨보다 그들을 잃었기에 80년대 내내 술 먹으면 울고, 망월동에 찾아갔죠. 5월이 되면 독감이 든 것처럼 몸이 쑤셔요."

42년 전의 기억과 그 이후의 삶을 얘기하다 보니 2시간여가 흘렀다. 이제 미래를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던 김씨가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을 닫았다.

"진상규명 해달라고, 투쟁하느라 자식들 교육을 제대로 못했어요. 아내가 엄청나게 고생했죠. 아내가 번 돈까지도 운동하는 데 썼으니."

가족들을 위해 쓸 계획이냐고 물었다.

"에이, 그렇게는 못하죠. 저에게 있어서 5월은 운명이에요. 나머지는 역시나 운동하는 데 써야죠. 5·18 항쟁 기간을 18일에서 27일로 아시고 계시죠? 틀렸어요. 우리는 '당시 국민투표로 정부를 만들자'고 요구했어요. 그 요구가 이뤄진 건 87년 6월 항쟁 이후예요. 5·18은 7년간의 전쟁이고, 전 그걸 알리는 일을 할 겁니다."

지금은 사라진 녹두서점 터에는 5·18 사적비가 서 있다. 그 건너편에는 색칠된 바위 조각 작품이 한 점 있다.
제법 큰 바위 세개가 포개진 모습이다. 맨 아래 바위는 하늘색이고 중간은 검은색, 맨 위는 녹색이다.


김상집씨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하늘처럼 맑던 광주가 어느 날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 그런데 기적처럼 새싹이 돋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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