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자 땐 뭐하고…한전의 '뒷북' 자구노력
2022.05.29 05:01
수정 : 2022.05.29 05:01기사원문
한전 30조 적자 우려에 해외 자산까지 팔며 6조원대 자구책
"팔릴 자산 먼저 내놓는 수밖에"…우량 자산 헐값 매각 우려
흑자 때 한전만큼 투자하는 데 어딨냐더니…적자 때는 매각?
발전公 성과급 파티 지적도…사장단 "구조·제도적 문제 해결"
[서울=뉴시스] 김성진 기자 = 올해 30조원의 적자가 전망되는 한국전력(한전)이 해외사업과 출자지분, 부동산을 처분하고 긴축경영을 통해 6조원 이상의 자금을 긴급 수혈하기로 했다.
지난 18일 오후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발전 자회사 등 11개 전력그룹사 사장단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긴급 개최하고 6조원대의 고강도 자구책을 내놨다.
전력그룹사는 긴축경영(2조6000억원) 외에 해외사업 구조조정(1조9000억원), 부동산 매각(7000억원), 출자지분 매각(8000억원) 등을 통해 약 6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올해 1분기 영업손실(7조7869억원)이 벌써 지난해 전체 영업손실(5조8601억원)을 넘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전 입장으로서는 6조원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팔릴 자산 먼저 내놓는 수밖에"…우량 자산 헐값 매각 우려
자구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업계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모습이다. 문제는 매각 방침을 밝힌 자산들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우량 자산이라는 데 있다.
한전이 연내에 매각하기로 한 필리핀 세부발전소의 경우 대표적인 우량 자산으로 꼽힌다. 한전도 오는 2036년 5월까지 25년간 세부발전소 상업운전을 이어갈 계획이었다.
함께 매각이 추진되는 미국 볼더3 태양광 발전소는 한국 발전사가 미국 내에 지은 첫 태양광 발전소로,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필수적인 포트폴리오로 꼽힌다. 특히 조 바이든 대통령의 태양광 발전 정책과 맞물려 사업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한전이 지분 매각을 밝힌 한전기술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전기술은 원전 설계와 에너지신사업(비원자력) 등을 추진하는 업체다. 지난해 101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으며 새 정부의 원전 해외 수출 정책에 따라 수익 증대도 예상된다.
한전은 보유 중인 한전기술 지분 65.77%에서 경영권 유지를 위한 지분(51%)만을 남기고 14.77%를 매각한다는 계획이다. 매각 지분은 4000억원 정도로 추산되지만 적자 대책 일환으로 매각을 밝힌 상태에서 제값을 받을지는 의문이다.
한전이 계획한 7000억원 규모의 부동산 조기 매각도 수조원의 적자를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짧은 시간에 헐값에 매각하기보다는 지대 수익이나 공공 목적의 개발 등을 위해 남겨두는 것이 낫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그룹사의 한 관계자는 "수익이 나는 자산을 매각하는 게 아깝지 않을 수 있겠냐"며 "자구책을 요구하니 당연히 팔릴 만한 사업성이 있는 자산을 먼저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흑자 때 한전만큼 투자하는 데가 어딨냐더니…적자 때는 판다?
한전의 차입금이 지난달 말 기준 51조5000억원까지 늘어나 자본잠식 우려까지 있는 상황에서 6조원대의 고강도 자구책은 당연하지만, 한전의 그동안 모습을 보면 위기 상황에 대비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있다.
한전은 사상 최대 흑자(12조원)를 기록한 지난 2016년에도 에너지 분야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유로 서민들의 민생을 위한 전기요금 인하 등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조환익 당시 한전 사장은 전기요금 인하 주장에 대해 "교각살우(矯角殺牛·소의 뿔 모양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라면서, 완강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조 사장은 그러면서 "에너지 분야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한 해에 6조4000억 투자하는 데가 어디 있느냐"며 "한전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너지 산업 기반을 깔기 위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그랬던 한전이 적자 상황에서 흑자시기에 조성된 해외 사업을 몇 년 되지 않아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시키자, 업계 안팎에선 "적자 때 팔려고 흑자 때 투자하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아울러 한전은 지난 2008년 사상 첫 적자를 겪은 뒤, 거의 2년에 1번꼴로 적자를 맞고 있다. 적자가 날 때마다 고유가 상황이 수반되는 상황인데도, 흑자시기에 연료비 연동제 조기 도입이나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책) 마련 등 대비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전의 적자 원인으로 지목되는 액화천연가스(LNG) 상승의 경우, 우크라이나 사태 초반부터 올해 1분기 스팟(현물)시장 가스 대란이 예상됐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전력도매가격(SMP) 상한제를 실시하기 전까지 그대로 가스 가격을 떠안고 있는 꼴이었다.
◆발전 공기업 '성과급 파티' 지적도…전력그룹사 "구조·제도적 문제 해결"
비상 상황에서 뼈를 깎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지난해 한전 산하 발전 공기업 기관장들은 2020년도 경영평가에 대한 성과급으로 1억원 안팎의 고액을 수령했다. 같은 기간 한전 및 발전 자회사 직원이 받은 성과급은 2000만원 안팎이었다.
한전의 전력판매 구조는 발전사로부터 비싸게 사서 민간에 싸게 공급하는 구조다. 한전이 연료비 부담을 떠안고 재정이 급격히 악화된 상황에서 산하 공기업들의 '성과급 파티'에 대한 시선이 곱기는 어렵다.
전력그룹사는 흑자 달성 등 재무상황 정상화까지 정원을 동결하고 ▲유사업무 통폐합 및 단순 반복 업무 아웃소싱 ▲개방형 직위 확대 및 인력교류 활성화 ▲성과 중심 승진·보직 제도 확립 등을 자구책을 내걸었지만, 공기업의 체질까지 바꾸는 조치라고 평가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전력그룹사 사장단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그간 해결하지 못했던 구조적·제도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전력그룹사의 역량을 총결집하겠다"고 강조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한전의 최근 자구 노력에 대해 "IMF 외환위기처럼 부도 사태에 직면해서 우량 자산까지 다 팔아야하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요금을 억제한 상황에서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가스공사가 져야 할 적자를 한전이 다 일방적으로 떠안은 것"이라며 "한전의 자체적인 자구방안은 있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우량자산이나 출자지분,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향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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