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의 청년은 왜 '애꾸눈 광대'가 됐나…'어느 봄날의 약속'
2022.05.30 07:08
수정 : 2022.05.30 07:08기사원문
(광주=뉴스1) 이수민 기자,이승현 수습기자 = 광대 옷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두손으로 입을 막고 그 틈새로 능숙하게 사이렌 소리를 낸다. '삐~' 관객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힌다.
남성은 여러 재주를 선보인다. 춤을 추고, 물구나무를 서고, 전 대통령들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한다. 그의 신명나는 몸짓과 함께 무대는 소용돌이처럼 42년 전 봄, 그날로 되돌아간다.
연극 '애꾸눈 광대-어느 봄날의 약속'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투쟁하다 한쪽 눈을 잃은 이지현씨(예명 애꾸눈 광대 '이세상')가 기획·연출한 5월 대표 연극이다. 이름 없이 산화한 시민군들의 애환과 민주주의의 열망을 담았다.
80년 5월 이후 4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책임자들은 반성과 사과조차 없고, 진실규명 대신 왜곡과 폄훼 세력만 늘어가고 있다.
학창시절 악극단을 기웃대고 고교 야구 응원단장을 했다는 이씨는 문화와 예술로 더욱 생생하게 그날의 참상을 전하고, 먼 후대에게 오월 정신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광대 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가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2010년 5월이다. 당시는 성대모사와 '썰 풀기'를 중심으로 한 1인극 형태였다. 이후 작품에 서사를 추가하고 배우와 무대 등 규모를 키우며 연극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가정과 학교,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자식들의 방황을 비롯해 떠난자의 슬픔과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극을 조명했다.
가장 최근 작품인 '어느 봄날의 약속'에는 그동안 금기시됐던 80년 5월 도청 지하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계엄군을 몰아낸 뒤 도청 지하실에 모인 항쟁 지도부의 얘기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무기를 반납하자는 '무기회수파'와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결사항쟁파'의 깊은 갈등을 그려낸다.
당시 실존 인물인 이종기 변호사와 문용동 전도사, 고등학생 시민군 안종필과 문재학 등의 사연을 바탕으로 무용과 노래, 손 안무 등을 추가해 예술적 요소를 더했다. 연극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제로는 뮤지컬에 더 가까운 '종합 예술 작품'이다.
극 초반, 옛 전남도청 앞에 총성이 울려퍼지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광주 시민들의 삶은 한순간에 변한다. 연필 대신 무기를 들고 시위대에 합류한 학생부터 결혼식을 미루고 광주시민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는 연인 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도청으로 뛰쳐나와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친다.
광대의 호응과 배우들의 연기력 덕분에 관객들도 함께 그 시절에 빠져든다. 오른손 주먹을 쥔 채 손을 흔들고 "김대중 석방" "계엄 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그날의 시민군이 된다.
소극장 공연의 한계를 가능성으로 극대화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극에 등장하는 계엄군은 단 한명이다. 부대 규모로 계엄군이 등장했던 여타 5·18 공연과는 확연히 다르다. 극은 어두운 조명과 스산한 음악 등을 활용해 계엄군 역할의 배우를 여럿 등장 시키지 않아도 그날의 공포감을 재현할 수 있다는 소극장 공연 만의 가능성과 매력을 보여준다.
공연은 2013년 상설 공연으로 전환해 전국 각지와 해외 등에서 206회 선보였다. 오랜 시간 관객을 만나며 5월을 대표하는 연극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깊은 슬픔과 웃음이 공존하는 연극 '애꾸눈광대-어느 봄날의 약속'은 5월 서울 순회 공연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와 학교와 상설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6월8일 광주 서구 광주중학교에서 학생을 위한 공연이 예정돼 있고, 6월14~16일, 7월12~14일에는 기존에 공연을 해온 광주 동구 광주아트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품에는 배우 김안순, 윤석, 정이형, 김정규 등을 비롯한 10명의 출연진이 등장하며 러닝타임은 60분이다. 매 공연 입장료는 무료이고 사전 예약 후 선착순으로 입장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