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를 추모하며
2022.06.23 14:00
수정 : 2022.06.23 14:00기사원문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오랜 친구들과의 약속이었다. 실없는 이야기. 사위 욕, 며느리 칭찬을 한참 늘어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 전봇대 너머의 루비의 눈은 내 결혼반지 속 루비보다 더 루비 빛깔이었다. 아름다웠다. 영롱했고, 갖고 싶었다. 소유욕을 느낀게 얼마만인지. 그대로 품에 안고 집에 왔다. 그렇게 내 네번째 자식과의 함께살기가 시작되었다. 너무 관용구가 되어버렸지만, 어린 생명의 숭고함 똥오줌 가리는 법을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늙어 관절은 예전같지 않았지만, 경험이 있었기에 힘겹지는 않았다.
묘생 13년 6개월. 자식처럼 품어 키우려 했는데 엄마처럼 나를 돌바준 루비였다. 처음 세 달엔 나와의 기싸움이 있었다. 자잘하게 챙길 일도 많았다. 이후로는 쭉 내게 스승이었던 루비다. 루비의 한가한 걸음. 세상 만사로부터 폴짝 떨어진 채 관망하는 태도를 내 늘그막의 모토로 삼았다. 그렇게 견뎠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날. 이제 정말 고아로구나, 칡흙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있을 때 잘할 걸. 라디오 작가로 산 25년의 삶 동안 그렇게 많은 사연, 모르는 아줌마 아저씨 청년과 노인의 삶을 읽고 다듬었다. 내 엄마 이야기도 좀 들을 걸. 엄마는 내게 자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맨 오빠한테 잘해라. 동생 챙겨라. 엄마 이제 그 사람들도 70이야. 다 잘하겠지. 말해도 자기 이야기는 못하던 엄마한테 한번은 더 물어볼 것을 후회하던 때. 루비가 없었다면 결딜 수 있었을까. 그때 귀를 쫑긋 세우곤, 은은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그루밍으로 위로하던 루비 때문에 살았다.
"부고. 우리 루비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짧은 추모의 시간을 가지려합니다. 함께 해주세요."
엄마의 부고를 쓸 때 다시는 이런 글을 쓸 일이 없겠지, 했다. 두번째 부고가 루비일 것이라곤 생각 못했다. 우리 집에 와 8년차 쯤 심장 쪽에 문제가 생겼다. 수의사는 덤덤하게 오래 살았다, 수술보다는 편하게 보내주자고 말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루비 목에 목줄을 채우고 산책에 나섰다. 운동으로 보식으로 1년만, 3년만 재촉했다. 그렇게 5년을 더 함께해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꾸준히 약을 지어주고 살펴준 우리동네 수의사에게도 고마움과 함께 부고를 전했다.
생전 카카오스토리에 루비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를 꾸욱 눌러주던 이들 10명이 우리집에 모여 앉았다. 두런두런 장례식 비슷한 일을 했다. 저 장롱 위에 올라가서 꺼내달라고 울고, 다시 올라가던 루비 이야기에 모두 킥킥대며 회상했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어” “그 상전 한번만 더 보면 좋겠네. 있을 때 잘할 걸.”
루비와 함께한 특별한 순간은 없다. 온순간이 특별했다. 그래도 꼽자면, 루비의 행보를 묻던 이를 만난 일이다. 루비의 엄마부터 형제들까지 길냥이를 챙겨온 캣맘이 있던 모양이다. 꼭 1년만에 충무로에 나갔을 때, 내가 루비를 만난 자리에 작은 포스트잇이 붙었다. “여기 머물던 새끼 고양이를 데려가신 분이 있을까요? 있다면 잘 키워주세요. 어미는 제가 돌보고 있습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주인은 아니었겠지. 나는 답장을 남겼다.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이름은 눈동자를 보고 떠올린 루비로 지었습니다. 잘 키우겠습니다. 언젠가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대댓글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약속도 없는데 부러 그 길을 다녔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대댓글을 발견했다. “따뜻하신 분을 만났다니 다행입니다. 이름이 예쁘네요. 형제들도 거리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루비는 특별했다. 그 삶을 기억한다. 반려동물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한 모든이들이 있을 때 잘하길 당부한다. 뻔한 말이지만, 영상도 많이 찍고 덜 혼냈으면 한다. 더 놀아줬으면 좋겠다. 새 고양이를 키우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나는 이 헛헛함에 무뎌질 때까진 혼자 있으려 한다. 내가 루비를 추모하는 방식이 옳다고 믿으며.
김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