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부부의 눈물…"애들이 뭘 안다고 '간첩딸' 소리하고 왕따시켜"

      2022.07.16 10:49   수정 : 2022.07.16 10:51기사원문
13일 광주 광산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송안종(71)·권옥련씨(68·여) 부부. 두 사람은 80년 5월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2022.7.16/뉴스1 © 뉴스1


송씨가 80년 5월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2022.7.16/뉴스1 © 뉴스1


권씨가 80년 5월 함께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그는 "이래선 안 되겠다, 시민들이 다 죽기 전에 같이 나가서 상황을 알려야겠다 싶어서 금남로에 나갔다"고 설명했다. 2022.7.16/뉴스1 © 뉴스1


송안종씨가 5·18로 인한 따돌림으로 가출을 한 둘째 딸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7.16/뉴스1 © 뉴스1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어린애들이 뭘 안다고 '간첩' 소리를 해요. 학교 가면 왕따시키고…."

13일 광주 광산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송안종씨(71)와 권옥련씨(68·여) 부부.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쟤네 부모가 5·18 나갔다더라', 그 꼬리표가 절대 안 떨어지니까, 애가 울고불고…."

이들 부부에게 1980년 5월은 계엄군의 만행보다 둘째 딸의 상처가 더 크게 남았다.

둘째 딸은 부모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십수 년을 '간첩 딸'로 손가락질 받다가, 결국 가족이 싫다며 가출했다. 연락이 끊긴 지 어느덧 20년이 다 돼간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제발 이제는 우릴 그만 미워하고 어디선가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살고 있기를 바라죠."

송씨의 눈엔 이내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아내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어깨만 들썩였다.

1980년 5월, 스물아홉 살이던 송씨는 당시 광주 서구 송원전문대(현 송원대) 앞 '제일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

경기도 성남에 있는 고모 집에서 몇 년간 얹혀살며 요리를 배운 덕에 취직이 쉬웠다.

1978년, 외지살이가 힘들어 고향인 전남 고흥과 가까운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광주에 내려오자마자 권옥련씨를 만나 연애 결혼을 했다. 아내도 대인시장에 있는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했다.

5월18일, 평온한 일요일이었다. 식당 일을 하는 부부에게 일요일은 유일한 휴일이다. 아내는 집에서 쉬겠다고 했다.

송씨는 서구 농성동에서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남동생을 만나려고 오후 3시쯤 홀로 집을 나섰다.

당시 부부가 살던 집은 동구 계림동, 서구 농성동에 가기 위해선 금남로 거리를 지나야 했다.

거리에 나온 송씨는 깜짝 놀랐다. 금남로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몰려나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전경들과 맞붙어서 싸움을 하고 있더라고요. 전두환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하도 시끄러워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어요. 정류장엔 버스도 없고 사람은 많고, 결국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됐죠."

어쩔 수 없이 시위대 사이에 끼어 사람 틈을 비집고 지나고 있었다. 광주제일고와 수창국민학교 사이를 지날 때였다.

골목에서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더니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비명과 고성이 터졌다.

군인들은 학생과 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무차별적인 몽둥이질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퍽퍽' 소리가 났다. 뺨과 옷에 피가 튀었다. 황급히 달리던 송씨도 머리와 어깨 등에 곤봉을 맞았다.

"당시는 젊었기 때문에 몽둥이를 맞고, 피가 낭자해도 도망을 갔죠. 골목 끝에 웬 쌀집이 있었어요, 그 간판이 딱 보이길래 그리로 튀어 들어갔죠."

쌀집 주인은 다급히 2층 다락으로 송씨를 숨겼다. 그는 쌀가마니 틈에 숨어 가쁜 숨을 내쉬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간의 시간 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재킷은 이미 피범벅이 돼 있었다.

쌀집 주인은 옆집 페인트 가게에서 작업복을 빌려와 송씨의 옷을 갈아입혀 주곤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내줬다.

집에 온 송씨를 보고 아내는 깜짝 놀랐다.

"피투성이에 머리와 얼굴이 퉁퉁 부어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남편인 줄도 몰랐죠. 상처를 보니 심각하더라고요."

부부는 계림동 로터리 앞에 있는 이상영 내과로 갔다. 뒤통수를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하루 이틀은 입원해야 하는 상처였지만 워낙 환자가 많은데다 입원실이 없어 귀가해야했다.

집에 돌아온 송씨는 바깥 상황이 예사롭지 않으니 한동안 가게를 쉬고 밖에 나가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 권씨는 달랐다.

"아내가 먼저 '이래선 안 되겠다, 시민들 다 죽기 전에 같이 나가서 이 상황을 알리자'고 하더라고요. 2~3일을 옥신각신하다 23일부터 함께 금남로로 나갔죠."

무작정 시내로 나가 시위 차량에 올랐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부부는 똑같은 빵모자를 쓰고 손을 잡고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구호를 외쳤다.

낮엔 시위에 참여하고 밤에는 집에 와 쉬는 날이 이어졌다. 곤봉에 맞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송씨는 더 목청을 높였다.

"아무 잘못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군인에게 폭행당한 게 억울하잖아요.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대검으로 찌르는 군인들의 만행을 보면서 치가 떨리더라구요."

시위에 나선 지 닷새째인 27일 아침, 부부는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인데 끝까지 같이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지금도 항상 미안하죠. 차라리 같이 끝까지 함께 있었더라면… 우리 부부도 같이 죽었으면, 덜 아팠을 텐데. 참담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죠."

항쟁이 끝난 뒤에도 송씨의 머리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젊을 땐 모르고 살았던 곳곳의 상처들이 더 커졌다.

우울장애와 기억력 감퇴 판정을 받았고 곤봉에 맞은 어깨는 갈수록 힘이 빠졌다. 프라이팬을 잡고 요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정신적 고통이 뒤따랐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5·18은 간첩의 소행으로 불렸다. 송씨 부부도 간첩이라는 오명을 썼다.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직장도 다니지 못했어요.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수군대기만 해도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어요."

1982년과 1984년 두 딸이 태어났다. 두 딸도 멍에를 피해가지 못했다. 커 가면서 부모가 5·18에 참여했던 것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았다.

첫째 딸은 남의 말이 중요치 않다며 꽤 어른스럽게 굴었지만 둘째는 달랐다.

"90년대만 해도 5·18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어린애들이 학교를 가면 따돌림을 당했어요."

둘째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인적 사항 수첩을 나눠줘 부모 특이사항에 5·18 피해사실을 적었다.

이미 1990년에 국가에서 5·18 피해자를 위한 보상금을 지급했던 터라 '민주유공자' 신분을 적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 그것을 적어야 만이 학교에서 크고 작은 지원금이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저는 최하급인 장애 14급으로 3500만원을 보상받았고, 아내는 시위만 참여했지 피해받은 것이 없어서 보상금은 받지 못했다고 적었어요. 보상금으로 분식집을 차려 운영하고 있다는 내용까지도요."

교사만 볼 줄 알았던 인적 사항 수첩의 내용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이들에게도 공유가 됐다. 지금이야 학교에서도 5·18을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으로 교육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아이들은 "너희 부모는 빨갱이"라며 놀렸다.

둘째의 방황은 심해졌다. 계속해서 가출을 하고 부모를 미워했다. 간신히 중학교를 마쳤지만 고등학교는 졸업하지 못했다. 1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3년간 수십번의 가출을 반복하다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완전히 소식을 감췄어요. 연락할 길도 없었죠."

어느 날 집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둘째가 언니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빚을 졌다고 했다. 그대로 두면 큰아이에게도 피해가 갈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겠다, 남아있는 사람은 살아야지 싶어서 이사를 했어요. 거의 도망쳤다고 봐야죠. 지금은 둘째랑 아예 연을 끊고 살고 있는데… 어디서든 사랑받고 살고 있길 바라요."

부부는 지난 몇 년간 민주유공자라는 사실을 꽁꽁 숨기고 살았다고 했다. 둘째 딸이 방황하기 시작한 게 5·18이고 가정도 피폐해진 게 5·18 때문이어서다.

다른 유공자들의 집 현관문에는 '민주유공자의 집' 문패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송씨 부부의 집 문에는 '민주유공자의 집' 문패가 없었다.

부부는 5·18로 인한 '간첩' 꼬리표와 손가락질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랬던 부부가 어쩌다가 얼굴을 공개하고 취재를 허락한 것일까. 궁금함에 질문했다.

"이제는 떳떳하니까 밝힐 수 있어요. 이제 더 전파하고 싶고, 알리고 싶어요. 대통령도 나서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리고 그러다 보면은…. 둘째 딸의 상처도 아물까 싶어서."

분식집을 그만두고 송씨는 미화원과 경비 일을 하며 수십 년을 보냈다. 지금은 부부가 함께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교통 지킴이 활동을 한다.


한 달에 10번 출근하고 1인당 월 27만원의 임금을 받는다. 거기에 노령연금 50만원을 보태 생활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노후생활, 그럼에도 두 사람은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기부를 하겠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 도와야죠. 특히 장애인들이요. 내가 많이 아파봤기 때문에 장애인 단체에 후원하고 싶어요. 5·18 피해자 이름으로요. 국가로 인해 상처받았던 그 누군가가 같은 국민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고. 꼭 알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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