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된 스피커, 만오천장의 LP… '클알못'도 사로잡은 헤이리 음악감상실
2022.08.19 04:00
수정 : 2022.08.19 04:00기사원문
수소 원자는 산소와 결합하면 물이 되고,
탄소와 결합하면 메탄이 되기도 한다.
음악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람, 장소 등과 결합해 추억을 소환한다.
과거 짝사랑하던 이의
싸이월드 배경 음악을 들으면 그가 떠오른다.
부산 해운대 밤바다에서 들었던 음악은
당시의 파도소리와 풍광을 소환한다.
슬픈 추억이 깃든 음악은 눈물을 만들고,
즐거운 기억과 연결된 음악은 미소를 만든다.
멜로디와 함께 경기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경기도 음악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마왕'을 소환하는 '성남 신해철거리'
'빰빠빠 빠빠빰 빠빠바 빰빠빠'. "전주만으로도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는 정해졌다." 당시 대학가요제를 생방송으로 봤던 이의 후문이다. 고 신해철을 주축으로한 락 밴드 무한궤도는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그 해 대학가요제를 씹어 먹었다. 이후 신해철은 록 밴드 넥스트에서 주옥같은 명곡을 남기고 심야 라디오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수년간 진행하며 '마왕'으로 불렸다. 2014년 신해철은 불의의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음악과 추억의 장소는 남아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발이봉로3번길에 있는 신해철거리는 가수 신해철의 삶과 음악을 기리는 거리다. 그의 작업실이 있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위치한다. 신해철 동상을 중심으로 한 160m의 짤막한 구간이다. 밴드 넥스트의 첫 글자, 'n'을 형상화한 상징게이트가 길의 시작을 알린다. 신해철 동상은 살짝 굽은 등에 마이크를 잡은 손,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린 그의 털털한 포즈를 재현했다. 가로수마다 노래 가사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 마왕 특유의 철학적 노랫말을 곱씹으며 거리를 거닐 수 있다.
입구 계단을 오르면 왼편 건물 지하에 그가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던 음악 작업실이 있다. 마왕의 음악과 정신이 집결된 곳이다. 서재에는 책이 빼곡한 서가와 소파, 테이블이 고스란하다. '앎의 의지'부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책을 통해 그의 방대한 독서 취향을 가늠해 본다. 그가 피우던 담뱃갑, 미니 칠판에 직접 쓴 마지막 스케줄을 보노라면 마왕이 불쑥 말을 걸어올 듯하다. 복도 벽 포스트잇에는 마왕을 그리워하는 팬들의 마음이 절절하다. 우리가 그의 음악을 기억하는 한, 마왕은 죽지 않는다. 잠시 안녕을 고할 뿐.
■파주 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난 클래식을 모른다. 그래도 소리는 느낄 수 있다." 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에 누군가가 남긴 구글 리뷰다. 2004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들어선 카메라타는 아날로그 사운드를 즐길 수 있는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다. 주인은 1970~1980년대에 아나운서 겸 라디오 DJ로 맹활약했던 방송인 황인용씨. '밤을 잊은 그대들에게' 위로를 건네던 그가 오늘날에는 숨 가쁜 일상에 음악을 잊은 이들에게 선율의 아름다움을 일러준다. 이에 아날로그 감성에 빠진 MZ세대부터 그를 추억하는 노부부까지 다양한 이들이 '디지털의 바다에 떠 있는 아날로그로 물든 섬'을 찾는다.
카메라타 건물은 한국 대표 건축가 조병수의 작품이다. 무덤덤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황홀한 음악의 세계가 펼쳐진다. 100살 먹은 빈티지 오디오와 1만5000여 장의 LP,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가 쌓아 올린 거대한 성채다. 기둥 하나 없이 3층 높이로 툭 터진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건 오직 피아노 소리뿐. 곡과 곡 사이의 적막도 여기에서는 음악이 된다. 카메라타의 요소요소는 음악을 위해 존재한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첫 번째 예가 압도적인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이다. 1920년대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사가 제작한 극장용 스피커, 1930년대 독일 제작으로 히틀러가 사용했다는 클랑필름 스피커가 어우러져 깊고 풍부하고 명징한 클래식을 들려준다. 두 번째 예는 공간 운영 방식이다. 스피커를 향해 일렬로 배치된 의자들, 음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진동 벨을 두지 않은 주문 시스템은 '음악 감상'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된다. 카메라타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방' 또는 '동호인의 모임'을 뜻한다. 16세기 말, 피렌체의 예술 후원자인 조반니 데 바르디 백작의 살롱에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022년 파주에서 카메라타는 여전히 건재하다.
■책을 펼치니 음악이 흘러 나왔다…의정부 음악도서관
의정부 경전철 발곡역 근방 장안근린공원에 자리한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음악과 책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음악 전문 공공도서관이다. 미군 부대가 오랫동안 주둔한 의정부의 지역색을 살려 블랙 뮤직(힙합·R&B·재즈·블루스·소울 등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도한 음악)을 특화 장르로 선정해 공간을 디자인하고 운영한다. 계단 벽을 힙합 감성 가득한 그라피티로 채우고, 블랙 뮤직을 주제로 한 장서를 빼곡히 비치했다.
1만㎡ 부지에 들어선 3층 규모 도서관은 음악·책·공간이 어우러진 예술적 아지트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독서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느슨한 선율은 음악으로 떠나는 여행의 촉진제가 된다. CD 6280여 장, LP 1200여 장, 음악 주제의 책 1180권에서 보물 같은 음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음악 도서관답게 책은 물론, CD·LP·DVD·악보 등 양질의 음악 자료까지 대여할 수 있다.
1층 북스테이지에는 음악·성인·아동 도서 5000여 권을 고루 비치, 온 가족이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사서컬렉션'을 눈여겨볼 것. 매달 도서관 직원들이 주제에 맞는 책과 음악 자료를 추천해준다. 그랜드 피아노로 시선이 모이는 오픈스테이지는 때에 따라 공연장 또는 독서 공간이 된다. 도서관의 하이라이트는 3층 뮤직스테이지. 재즈·블루스, 클래식, 힙합 등 온갖 음악 장르를 아우르는 CD와 LP를 비치, CD 플레이어나 턴테이블로 아날로그 음악의 매력에 푹 빠진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