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스 스플린' 와인, 보들레르를 일으켜 세우고 현대미술로 가는 문을 열다

      2022.09.04 11:55   수정 : 2022.09.04 12:12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샤또 샤스 스플린(Chateau Chasse Spleen)은 '보들레르의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는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현대 시의 출발점이 된 시인입니다. 1800년대 중반 황금기를 맞았던 프랑스 시단이 보들레르의 시를 중심으로 두 시대로 나뉠 정도입니다.

하지만 시집은 단 한권 뿐입니다. 그 유명한 '악의 꽃(Les fleurs du mal)'.

보들레르는 타고난 천재 예술가였지만 그의 삶은 온갖 기행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매음굴에 빠져 살더니 성년이 되자마자 술, 도박, 마약으로 상속받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탕진합니다. 가족에 의해 금치산자로 지정받은 그는 죽을때까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둠 속을 살던 그에게 순간순간 빛을 보여준 와인이 바로 샤스 스플린입니다.

샤스 스플린은 또 미술사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올랭피아(1863년, 130*190cm, 캔버스에 유화, 오르세 미술관)' 탄생에 간접적이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 나아가 현대 미술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데 일조를 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큐비즘(cubism)' 등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샤스 스플린 이 와인이 보들레르, 마네, 피카소와 어떻게 얽혀있을까요.




■어둠에 빠진 보들레르에 순간순간 빛이 되어 준 와인
1821년 파리에서 태어난 보들레르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정말 손꼽히는 자유분방한 기인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때도 천재성과 독특한 기행으로 유별났지만 21살 성년이 된 뒤에는 불과 25개월 만에 그의 친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10만 프랑이 넘는 돈의 절반을 탕진합니다. 술, 매음, 마약, 도박 중독에 빠진 결과였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그의 가족들은 보들레르에 대해 금치산자 지정을 요청하고 남은 돈 모두를 법정후견인에 맡겼습니다. 덕분에 그는 죽을 때까지 경제적 미성년자로 살았습니다.

사실 보들레르는 이미 대학 입학 한참 전부터 유대인 매춘부에 빠져 사창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때 걸린 성병은 그가 죽던 46살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힙니다. 그는 또 단역 배우 출신 잔느 뒤발을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3대가 창녀 집안인 여성이었습니다. 보들레르는 그녀를 '검은 비너스'라 부르며 무려 14년간 치명적인 사랑을 합니다.

1857년 그의 나이 36살에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악의 꽃'이 출간됩니다. 성년 이후 15년 간 살아온 모든 것이 담긴 작품이었지만 시집의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두가 매춘, 성행위, 동성애, 시체, 죽음 등에 대한 묘사로 가득했습니다. 당시 평론가 중 극히 몇몇은 "열정과 예술이 가득 찬 대작"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절대 다수는 "그냥 타락한 쓰레기"라며 조롱했습니다. 결국 보들레르는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기소돼 벌금형과 함께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후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우울증과 성병에 마비 증세까지 겹쳐 더 힘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져내리던 시기, 보들레르가 즐겨 마셨던 와인이 샤스 스플린입니다. 어쩌면 우울증으로 자칫 삶을 내려놓을수도 있던 그 때 그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운 와인입니다.

하지만 이 와인은 보들레르가 즐겼던 당시에는 그냥 저렴하고 품질 좋은 이름조차 없는 와인이었습니다. 샤스 스플린이라는 이름은 1700년대 말 영국 시인 바이론이 샤스 스플린 집안에서 와인을 비롯한 환대를 받은 후 "우울증(Spleen)을 쫒는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는 것에 착안해 1800년대 중반 이 와이너리의 오너가 '샤스 스플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매년 샤스 스플린 라벨에는 해마다 싯구절 한 문장이 붙습니다.




■보들레르를 스승으로 모시던 마네 '올랭피아'를 그리다
1865년 파리의 한 살롱에 걸린 그림 하나가 프랑스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누런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낸 전라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무표정한 얼굴로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는 이 그림에 프랑스 사회는 마치 치부를 들킨 듯 불쾌감을 넘어 분노까지 표출합니다. 심지어는 갑자기 우산을 들고 그림을 찢으려 달려드는 사내도 있었습니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걸작,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었길래 작품 훼손을 막기 위해 경찰이 그 앞을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사람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리기까지 했을까요.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년, 165*119cm, 캔버스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를 오마주 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림 구도는 물론이고 옷을 벗고 누워있는 여인의 자세, 다른 등장인물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그런데 누워있는 비너스가 이전의 비너스와 너무 달랐습니다. 마네가 그린 비너스는 신화 속 우아한 비너스가 아니었습니다.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목을 장식한 '초커 목걸이'는 매춘부를 상징하는 장신구였습니다. 그림 제목 '올랭피아(Olympia)'도 당시 매춘부들이 주로 사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림 속 흑인 여성이 들고 있는 꽃다발은 스폰서가 그녀에게 보낸 선물입니다. 이 그림은 신화의 한 장면이 아닌 당시 프랑스 도시 곳곳에서 성행하던 매춘의 현장을 사진처럼 담아낸 그림이었습니다.

마네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미술 천재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명 작가로부터 그림을 배운 고전주의를 신봉하는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비너스를 창녀로 둔갑시키며 당시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그렸을까요. 그건 보들레르 때문이었습니다. 마네는 11살 위인 보들레르를 정신적 스승으로 흠모했습니다. 그런 보들레르는 늘 "각 시대는 자신만의 자세와 시선, 몸짓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그 말은 "신화나 과거 사회의 모습이 아닌 현대사회 지금 그대로의 생활상을 그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마네가 고전적 화풍을 버리고 시대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정말 파격이었습니다. 당시엔 과거의 명작을 오마주할 경우 그림 속 인물은 반드시 신화, 성서 속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화, 성서 속 이야기를 얼마나 잘 해석하고 그에 가깝게 그렸는지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 속 인물들은 1860년대 자신과 함께 살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앞서 1600년대 카라바조가 성화 속 이야기에 그가 일상에서 만난 하층민을 그려넣었던 것처럼 파장이 못지 않았습니다.

마네가 이에 앞서 1863년 발표한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년, 208*264㎝,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 미술관)'도 이 때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와 라파엘로의 원작을 모사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을 일부 재해석 한 작품으로 마네의 그림 속에서 옷벗은 여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누드 모델이었고,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그의 매제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랭피아가 왜 미술사의 걸작으로 꼽힐까요. 사실 이 그림은 덧칠이 거의 없어 그리다 만 것 같은데다 원근법조차 적용되지 않아 밋밋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여인을 그릴 때 살결을 붓질 하나 보이지 않게 하얗게 칠하고, 드레스도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빛나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아닌 신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죠. 그러나 올랭피아의 여인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습니다. 더구나 올랭피아는 회화의 절대 진리이던 원근법마저 파괴했습니다. 매춘부와 침대, 배경 등이 입체감 없이 그냥 붙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모든 비평가들은 "마네의 실력이 형편없어졌다"고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마네의 이같은 파격적인 그림으로 인해 프랑스 젊은 화가들이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본대로 느낀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 현대미술로 가는 문을 연 것입니다.




■현대 미술로 가는 문을 열다..피카소도 여기서 나왔다
마네는 1882년 '폴리베르제르바(1882년, 96*130㎝, 캔버스에 유채)'를 발표하며 또 한 번 미술계에 '거대한 수수께끼'를 던집니다. 파리의 유명 술집이던 폴리베르제르의 여성 바텐더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딘지 그림이 좀 이상합니다. 그림 속 여성 바텐더는 정면을 보고 있는데 뒤의 거울에 이 여성의 뒷모습이 비쳐져 있습니다. 사물의 원리대로라면 이 여성의 모습은 가려져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뒷모습이 그림에 나온 것입니다. 이 작품은 마네가 임질에 걸려 마비 증세로 고생하다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병마에 시달리던 마네가 실수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의 그림에 두 개의 '시점'이 적용된 것입니다. 이 그림은 '복수의 시점'을 적용한 최초의 그림으로 나중에 '큐비즘(cubism)'의 시작점이 됩니다.

큐비즘은 3차원적으로 구성된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마치 여러 각도에서 그린 그림 여러 개를 가위질 해 하나로 붙이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네가 그린 복수의 시점 그림은 훗날 야수파의 원조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 등을 거쳐 입체파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 243*233 cm, 캔버스에 유채, 뉴욕현대미술관)'이라는 걸작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샤스 스플린을 마셔보니..가난한 자의 라뚜르
샤스 스플린 와인으로 시작해 보들레르, 마네, 피카소까지 멀리도 왔네요. 이처럼 보들레르의 목숨을 구하고, 현대미술 탄생에 간접적인 역할을 한 샤스 스플린은 보르도 와인 중에 저평가 된 대표적 와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만큼 뛰어난 품질을 가졌음에도 가격이 저렴해 이른바 '가성비 와인'이라는 것이죠. 시중에서 올드 빈티지만 아니라면 7만원 안팎에 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일각에선 '가난한 자의 라뚜르(Chateau Latour)'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샤스 스플린 2017을 열어봅니다. 뽑혀 올라온 코르크에서는 좋은 와인에서 맡을 수 있는 삼나무 향과 블랙 커런트 향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잔에 따라진 와인은 짙은 루비빛입니다. 너무 어린 와인이라 1시간 정도 디캔팅을 진행해 숨을 불어넣습니다. 잔에서 올라오는 향은 블랙 계열의 아로마와 삼나무 향, 젖은 나뭇잎, 젖은 이끼 등 서늘한 향이 지배적입니다.

입에 넣어보면 블랙 커런트 아로마와 매력적인 산도가 일품입니다. 와인이 입속에서 사라질때쯤 모습을 드러내는 타닌은 다소 두껍고 거칩니다. 세월이 녹아들 시간이 필요해 보이지만 입속을 제대로 말려버립니다. 이어 비강으로 들어오는 삼나무, 커피, 초콜릿, 연유, 바닐라 향이 좋습니다. 피니시도 두 숨 이상 이어지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삼나무향입니다.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중략)...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의 앞 부분과 마지막 부분으로 한참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에 나왔던 대사이기도 합니다.
오늘 샤스 스플린 한 잔 어떤가요. 보들레르처럼 지치고 힘든 날에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날에도 샤스 스플린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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