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하던 스무살 청년이 왜 대검에 찔려야 했나요?"

      2022.09.10 10:01   수정 : 2022.09.10 10:01기사원문
7일 오후 광주 광산구 동곡동의 한 철물점에서 만난 오병국씨(62)가 80년 5월 당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있다. 2022.9.10/뉴스1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아세아 자동차에서 장갑차를 몰고 나온 시위대의 모습 ⓒ News1DB


오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를 회상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9.10/뉴스1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어서 오세요~. 아, 볼트요? 어디에 쓰시게요? 색깔은 상관없구요?"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지난 7일 오후 광주 광산구 동곡동의 한 철물점. 주인장 오병국씨(62)가 살갑게 손님을 맞이한다. 약간 불편해 보이는 한쪽 다리를 끌며 익숙하게 볼트를 찾아 건넨다.

"원래 볼트는 낱개로 안 파는 데 특별히 낱개로 드릴게요."

서비스 멘트도 잊지 않는다. 볼트를 주문한 손님이 나가자 새로운 손님이 들어온다. 오씨의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취재진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약 20여 분간 손님 너덧 팀이 다녀가고 나서야 잠시 쉴 틈이 생겼다. 단골이 많은 듯했다.

자리에 앉아 오씨와 인사를 나누고 5·18 정신적 손해배상 인터뷰 취지를 설명했다. 차분하던 오씨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서랍에서 멘소래담을 꺼내 바지를 걷고 종아리에 약을 발랐다. 오씨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다리도 덜덜 떨렸다. 어느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눈물 한줄기가 뚝 떨어졌다.

"아직도, 그땔 생각하면 공포감이 느껴져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도 어렵고…. 5·18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를 감싸는 공기부터 달라져요."

오씨는 긴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야 42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80년 5월, 평범한 스무 살 청년이던 오씨는 남구 방림동에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았다. 고향은 전남 강진, 중학교 졸업 후 광주로 올라왔다.

낮에는 버스터미널(현 롯데백화점 위치) 후문 앞 철물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인시장 앞 동양학원에서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어요.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가고 싶었죠."

주경야독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검정고시 학원에서 만난 친구들은 전부 오씨처럼 '학업'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거리에서 대학생들을 보며 늘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대학생을 알아보는 방법은 '머리 길이'에 있었어요. 젊은 사람 중에 머리가 긴 사람들은 다 대학생이려니 했죠…. 난 대학생들을 동경했고, 그래서 머리를 길렀어요."

행색은 대학생이랑 비슷해도 관심사는 분명히 달랐다. 오씨는 5·18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시위에 참여하거나 대학생 친구를 둔 적도 없었다.

"퇴근 후 검정고시 학원에 가며 '오늘은 데모를 하네', '오늘은 안 하네'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었죠."

5월19일이었다. 오씨는 "사장이 '오늘은 일찍 마무리하고, 내일 출근은 늦게 하라'고 했다. 계엄령이 내려져 전날부터 군인들이 시내 곳곳에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매장을 나와 금남로 거리를 지나는데 군인들이 젊은 사람만 보면 무차별 폭행을 하고, 축 처진 사람을 차에 싣고가는 걸 봤다.

"군안들이 길을 지나는 아줌마를 발로 밟는 것도 봤는데, 그땐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20일, 오전 11시쯤 느지막이 출근했다. 금남로 거리에선 학생과 군인들이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당시 오씨가 일하던 철물점은 가게에서 쓰는 1톤 트럭을 공용터미널 로터리에 세워두곤 했다. 오씨는 차량이 걱정됐다.

"워낙 많은 사람이 금남로로 모이니까, 혹시나 차량이 파손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죠."

오후 5시30분쯤 가게를 정리하고 차를 빼기 위해 로터리로 나갔다. 다행히 차는 문제가 없었다.

그때 멀리서 '펑펑'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금남로와 광주소방서 양쪽에서 군인들이 밀고 들어왔다. 양쪽에서 쫓긴 시민들은 로터리 쪽으로 밀렸다. 깜짝 놀란 오씨는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워낙 많은 인파에 끼어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는데 그때 오씨 바로 앞으로 최루탄이 떨어졌다.

"아직도 생생하고 분명해요. 숨쉬기도 어려운 매캐한 냄새와 매운 고통. 얼굴도 화끈화끈 너무 따가워 뺨을 두 손으로 톡톡 때리면서 물을 뿌렸어요. 근데, 순간 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난 아무 죄도 없는 일반 시민인데, 왜 나까지 고통받아야 하느냐…."

오씨는 그대로 시위대에 합류해 금남로와 무등경기장, 광주역까지 따라다녔다.

광주역 앞에선 시위대 버스에 탑승해 "전두환 물러나라", "김대중 석방하라", "신현확(당시 국무총리) 물러나라"고 외쳤다.

그때 군인들이 쏜 최루탄이 창문을 통해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버스가 휘청거리더니 급정거했다. 오씨를 비롯한 시민들은 콜록대며 겨우 버스에서 빠져나왔다.

나와서 보니 차량 바로 앞에 커다란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다. 운전자가 최루탄 가스를 맞고 핸들을 잘못 꺾어 북광주 전화국 건물 앞 조각상을 들이받을 뻔한 것이었다.

"우리가 죽을 뻔한 거예요, 조금만 더 갔으면 그걸 받고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 다 죽었겠구나 싶었죠. 그 순간 '내가 죽다 살았구나, 이제 죽었단 생각으로 저놈들을 다 쫓아내자' 생각했죠."

21일 오전 11시쯤 전남도청 앞에 시위대가 모였다. 아세아자동차에서 가져온 '군용트럭'을 시민군이 몰았다. 그걸 타고 광주의 실상을 알릴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했다. 오씨도 차에 올랐다.

트럭을 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을 외치며 북구 용봉동 전남대 앞까지 갔다.

오후 1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군인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또 한 번 최루탄이 터졌다. 얼굴에 최루탄을 맞은 오씨는 바로 앞 하천에 뛰어들어 가스 가루를 씻어냈다.

"하천 구석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그때 멀리서 군인들이 '저놈 잡아'라며 뛰어오더라구요. 잡히면 죽겠다 싶어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죠."

용봉동의 한 가정집으로 숨어들었다. 집에는 60대쯤 돼 보이는 할머니 혼자 있었다. 할머니는 안방 이불 사이로 오씨를 숨겼다. 잠시 뒤 군인이 집 안으로 쫓아 들어와 할머니에게 대검이 꽂힌 총을 겨눴다.

"방금 이 집으로 들어온 놈 내놓으시오."
"우리 막내아들인디 왜 그라요, 일도 못 가고 잠깐 집 앞에 나갔다 온 건디…. 야는 시위하고 그런 놈 아니요."

할머니의 만류에도 군인들은 집안을 뒤졌다. 얼마 뒤 이불 뒤에 숨어있던 오씨가 붙잡혔다.

오씨가 도망치려고 하자 군인들은 폭행하기 시작했다. 머리와 허벅지, 목 등을 곤봉으로 무차별 때렸다. 군인 한 명이 대검으로 오씨의 엉덩이 쪽을 찔렀다. 안방에 시뻘건 핏물이 튀었다. 오씨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기독병원이었다. 5월23일, 이틀 만에 의식을 찾은 것이었다. 어떻게 병원에 온 것인지, 누가 옮긴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엔 붕대를 칭칭 감고, 허벅지와 엉덩이엔 거즈와 붕대가 잔뜩 감겨있었다.

"수십 바늘을 꿰맸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빈혈이 와서 위도 못 보고 밑도 못 보고, 정면만 보고 멍하니 누워 있었어요. 열흘 동안 있다가 퇴원했는데 그러고도 몇 년 동안 아파서 집 밖을 못 나갔어요."

91년 현재의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오씨는 집에서만 생활했다.

처음 몇 년은 거의 형사들과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5·18 부상자라는 것이 알려지자 형사들이 오씨와 어머니, 동생을 감시하겠다며 매일같이 집에 찾아왔다.

"결혼하고 나서야 다시 철물점에 나가 일을 했지, 80년 이후 거의 10년을 산송장으로 살았어요."

만성 어지럼증과 근육통으로 멘소래담을 달고 살았다. 날마다 진통제 등 약을 먹어야 했다. 하도 약을 먹으니 간이 안 좋아지고 속이 쓰려 잠을 자지 못했다. 잠을 자기 위해 술을 먹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다리와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다리도 절어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1990년 국가에서 5·18 유공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할 때는 국가 기준 '장애 14급'을 받고 3700만원을 보상받았다.

"3700만원은 80년 이후 10년간 쓴 병원비를 갚는 데 썼어요. 그동안 병원비와 약값이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걸 갚으니 남는 돈도 없었죠."

신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더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오씨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머니마저도 "왜 데모하는데 끼어서 고생하냐" "뭐 하러 거길 갔냐"며 힐난했다. 오씨가 너무 힘들어하니 안타까움에 하는 말이었지만 오씨에겐 그 말도 상처가 됐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북한군의 소행', '폭동' 등의 망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오씨는 자신처럼 당시 부상당한 민주유공자들과 모여 5·18 부상자회 활동을 했다. 20여년간 사무처장, 복지국장, 총무국장, 이사 등을 맡아 명예 회복 싸움을 벌였다.


부상자회 회원들과 함께 트라우마센터에서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신군부에 대한 재판이 열리면 중앙에 서서 사과하라고 소리쳤지만 마음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겹다고 하잖아요. 5·18 얘기 언제까지 할 거냐고. 근데 전두환은 진실을 밝히지도 않고 죽었어요. 우리에게 5·18은 아직도 진행 중이에요. 80년 5월부터 2022년 9월까지 42년째 시위를 하고 있는 거죠."

오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에 큰 의미를 둔다고 했다.
그것만이 지난 42년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생을 동경하고, 돈 벌어서 공부하고 싶었던 그 스무 살 청년이 어쩌다가 남의 집 안방에서 피가 낭자하니 찔리고 맞았는지 조금만 공감을 해주시고…. 우리가 꼭 그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게 국가가 살펴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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