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처녀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 결국 〇〇병에 걸렸다

      2022.09.17 06:00   수정 : 2022.09.17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것을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먼 옛날, 한 노령의 의원이 지방에 있는 친척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의원은 풍경도 감상할 겸 서두르지 않고 걸어서 이동했다.

그런데 해가 중천을 넘어서자 오랜 시간동안 걸어서인지 다리가 무겁고 피로하여 한 마을의 객점(客店) 툇마루에 앉아 쉬게 되었다. 객점은 마을의 높은 곳에 위치해서 앉아서 쉬며 보는 경치도 볼 만 했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한적하여 멍하니 앉아 시도 한 수 짓고 졸기도 하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의원은 날도 저물어 그날은 이 객점에서 하룻밤 묵고 가기로 했다.

저녁이 되자 계집종이 호롱불을 밝히고 주모는 시키지도 않은 저녁 밥상을 들였다. 주모가 생각컨데 피곤해 보이는 노인을 보아하니 오늘 밤은 객점에서 묵을 수 밖에 없을거라 여겼다. 의원이 국물을 떠서 먹어보고 나물 맛을 음미하면서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의원은 “주모, 혹시 이곳에 심한 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주모가 얼굴을 찡그리고 한 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제 나이 40에 겨우 딸자식 하나 두었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갑자기 앓아누웠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답도 안 하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벌써 2달 동안 신음소리만 내면서 저러고 있으니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한번은 액사(縊死, 목을 매 죽다)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요.”라고 했다.

의원은 “모든 병은 원인이 있는 법인데, 무슨 까닭인지 모르는가?”하고 묻자, 주모는 “뭔 일인지 당최 말을 하지 않으니 고문이라도 하지 않으면 모르겠소. 마치 종이에 먹인 기름 마냥 점점 병이 깊이 스며들고 무거워지고 있습니다요.”라고 하였다.

의원은 “그럼 혹시 내가 귀신같은 의원을 한 명 소개해 주면 진찰을 받도록 해 볼 텐가?”하고 물었다.

그런데 주모의 눈빛이 부싯돌이 켜지듯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르신. 제가 어젯밤에 꿈 속에서 오늘 귀인을 만난다고 하더니 바로 어르신이 그 귀인이신가 봅니다. 어르신은 저게 어젯밤 꿈속에서 뵀던 바로 그 귀인의 얼굴입니다요. 제 여식을 죽이던지 살리던지 진찰을 한번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의원은 의아해했다. ‘어찌 나를 바로 의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꿈속에서 나를 봤다면, 나를 누군가 이곳으로 일부로 보낸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꿈속의 의원이라고 여기기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의원은 “오늘 밤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진찰을 해보겠네.”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의원은 주모가 보는 앞에서 딸을 마주 대했다. 딸은 봄날의 이슬비처럼 유한(幽閑)하고 요염한 자태로 절세의 규수라도 미치지 못할 듯하였다.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광대뼈 부위에 홍조를 띠고 있어 마치 분칠을 한 것 같았다. 허열(虛熱)이 분명했다.

진맥을 해보니 양쪽 척맥이 모두 부동(浮動)하고 좌관맥이 유독 현삭(弦數)하였으니 이는 신음(腎陰)은 허해지고 간울(肝鬱)로 인한 ‘음허화동(陰虛火動)’이었다. 음허화동(陰虛火動)이란 화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무척이나 고치기 어려운 병증 중 하나다.

의원은 느끼는 바가 있어 딸에게 시험 삼아 물었다. “무언가 뜻한 바 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의원은 다시 “네가 있는 그대로를 말을 해도 살지 죽을지 모르는데, 있는 것조차 말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너의 은곡지사(隱曲之事)까지 알 수 있겠느냐? 만약 살고 싶다면 네 마음속의 말을 털끝만큼도 숨기거나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은곡(隱曲)이란 단어는 대소변을 보는 일이나 남녀의 방사(房事)와 관련되어 남모르게 이루어지는 일을 말하는 은어다. 의원의 은곡지사라는 말에 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의원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모에게 눈치를 주며 밖으로 나가게 했다.

딸아이는 “의원님은 어찌 과년한 처녀 앞에서 은곡지사라는 단어를 함부로 내뱉으십니까?”라고 따졌다. 마치 그런 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의원은 “내 너를 진맥해 보니 네가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내가 있어 이처럼 죽을 듯한 병에 이른 것이니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더니 한참 있다가 말을 꺼냈다.

“의원님은 제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미 소녀의 속 깊은 곳까지 알고 계시니 어찌 즉시 처방을 내려 살려주지 않으십니까?” 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지금 살 수 있는 방도를 찾고 있으니 걱정말고 그 내막을 말 해 보거라.”
딸은 자신이 흠모하는 남성이 있는데, 그 남자에게 넌지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달 전에 다른 여자와 혼례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 남자를 속으로 사모했던 바를 어머니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알고 있지 않기에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혼례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로부터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고 했다. 딸은 소위 말하는 상사병으로 간울(肝鬱)에 의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의원은 딸에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면서도 이루지 못할 일이 많이 있단다. 지금은 괴롭고 참담하겠지만 인간사 새옹지마와 같아 훗날 더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보니 너에게 그 남자보다 더 훌륭하고 멋진 사내를 남편으로 짝지어 주시려는 하늘의 뜻인 것 같다.”라고 위로를 했다.

그리고 나서는 “그래 지금 어떤 증상이 가장 고달프냐?”라고 물었다.

딸은 “얼굴이 화끈거리면 뜨겁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픕니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억울하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픕니다. 그리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답답한 것이 마치 솜뭉치가 숨길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싶어도 숨쉬기조차 힘이 듭니다. 밤에는 오매불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현듯 광녀처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기도 합니다. 밥 생각이 전혀 없고 억지로 먹어보고자 한입 삼키면 명치가 달리며 체하기 일쑵니다. 그리고 두 달째 월경도 끊겼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먼저 침을 꺼내어 손목에 있는 신문혈과 발가락 사이의 행간혈을 사(瀉)한 뒤에 발목의 조해혈를 보(補)했다. 이 혈자리들은 긴장도를 낮추고 진정작용이 있으면 화병에도 사용된다.

다음으로 폐와 대장의 낙맥인 열결혈에 자침했다. 열결혈은 기를 소통시키면서 두통과 자율신경실조 증상에 다용하는 혈자리다. 침 치료 후 소요산(逍遙散)에 생지황, 황금, 황련, 산치자를 더하여 이어서 보름 정도 복용하도록 처방했다. 소요산은 간울(肝鬱)을 풀어주고 심화(心火)를 진정시켜주기에 불안신경증이나 우울증, 불면증에 효과적인 처방이다. 소요(逍遙)라는 이름은 이 처방을 복용하면 마치 뒤뜰을 거닐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딸은 의원에게 물었다. “이 처방은 어떤 효능이 있는지요?”
의원은 “네가 이 처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책의 가장 맨 앞의 소요유(逍遙遊) 편을 읽어 보도록 하거라. 이 처방의 의도뿐만 아니라 너의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있던 장자(莊子)를 건네주었다.

장자의 소요유 편은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함을 버리고 얽매임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의원은 딸 아이에게 “침은 이번만으로도 족하고 내일부터 탕제를 복용하도록 해라. 약제는 이곳 마을의 약방에 들려 조제를 해서 전달해 주도록 하겠다. 내가 먼저 네 어미에게 진찰을 요청한 것이니 비용은 걱정하지 말거라. 한 보름정도 탕제를 잘 복용하면 네 증상은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라고 당부를 하고 객점을 떠나 발걸음을 옮겼다.

딸은 진찰 도중 의원에게 몇 마디 조언을 들었을 뿐이고 단 한번의 침치료만 했지만,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함이 느껴졌다. 마치 눈앞에 자욱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듯했다. 딸은 의원이 처방해 준 탕제까지 잘 복용하면 자신의 병도 나을 거라 믿었다.

의원은 친척 집을 방문해서 수일간 머물렀다. 그런데 한 7일만에 벌써 일정이 마무리되어 되돌아 오늘 길에 다시 객점을 찾았다. 마을 어귀 멀리서 보니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딸이 객점 대문 밖을 출입하는 것이 보였다. 의원은 흐뭇했다. 그런데 딸 또한 의원이 객점에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달려와 기뻐서 절을 하며 맞아주었다. 그 고마움은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의원 입장에서는 잘 나아줘서 고맙고, 환자 입장에서는 치료해 줘서 고마웠던 것이다.

의원은 ‘내가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 불과 일주일 남짓인데, 보름 동안의 방제를 모두 복용하기도 전에 쾌차하니 참으로 고마운 인연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의원에게는 환자를 보면 고쳐주고 싶다는 측은지심과 사명감이 필요하고, 환자에게는 낫고 싶다는 희망과 나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게다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가장 우선은 의사와 환자 간의 서로 간의 신뢰만 한 것이 없다.

■오늘이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우잠잡저> 醫案. 那女肝鬱病. (중략) 侍女引燭, 主母告飯. 下箸未及, 忽聞呻吟之聲, 隱隱如失襄䑓之春夢者, 余問, “有甚病人乎?” 主母蹙眉而對曰, “行年四十, 只有一箇女息, 年當及笄, 而卒得身病, 百治兩朔, 去去益甚, 是悶是悶” 余曰, “凡病有祟而作, 未知何祟云乎?” 曰, “不知何祟, 而如滴紙之油, 漸漸沈重耳.” (중략) 遂診其脈, 則兩尺皆浮動, 而左關獨帶弦數, 必是思男不得, 遂傷心脾, 因致肝鬱脾虛下陷, 所謂陰虛火動, 是誠十分難治者. (중략) 遂瀉神門行間, 次補照海, 而次取肺大膓絡脈列缺. 因劑龍膽瀉肝湯, 加靑皮七分, 五貼, 先踈肝膽之氣, 次劑逍遙散, 加芩連 山梔, 以凉血, 養血扶陰之意也. 臨發誡之曰, “吾之回還, 似在一望, 其間連次繼服, 則爾病得蘇矣.” 遂轉向松廣寺. 越明日離程, 至府南族人家. 六七日, 了事后, 至廣淸店, 則那女業爲出入, 而欣然拜迎, 其所慇懃, 不言可想. 吾之往還不過十數日, 而二劑服藥, 亦不過十五貼快差, 誠非偶然, 奇會也.(의안. 처녀의 간울병. 중략. 계집종이 촛불을 밝히고 주모가 저녁밥상을 들였다. 식사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양대의 봄 꿈을 잃은 듯한 신음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내가 “심한 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 물으니, 주모가 이마를 찡긋하며 대답하였다. “제 나이 40에 겨우 딸자식 하나 두었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어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2달 동안 온갖 방도로 치료를 해도 낫지는 않고 날이 갈수록 병세가 심해지고 있으니,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드디어 진맥을 해보니, 양쪽 척맥이 모두 부동하고 좌관맥이 유독 현삭하였으니, 이는 바로 남자를 그리워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급기야 심과 비가 손상되고 그로 인해 간울로 비가 허하게 되어 내려앉은 것이니 이는 이른바 음허화동으로 무척이나 고치기 어려운 증상이다. 중략. 마침내 신문과 행간을 사한 뒤 조해를 보하고, 다음으로 폐와 대장의 낙맥인 열결을 취혈하였다. 그리고 용담사간탕에 청피 7푼을 더한 것 5첩을 지어 우선 간담의 기운을 소통시키고 다음으로 소요산에 황금, 황련, 산치자를 더하여 혈을 식혔으니, 이는 혈을 길러 음을 북돋게 하려는 의미였다. 떠날 때에 “내가 돌아올 때까지 보름 정도 걸릴 터이니, 그 사이 계속해서 복용을 하면 네 병은 나을 것이다.”라고 당부하고는 마침내 송광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다음날 길을 떠나 부남에 있는 친척 집에 이르렀다.
6~7일 지나 일을 마친 후에 광청리 객점에 들르니 그 여자가 이미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기뻐서 절하며 맞아주었는데, 그 은근함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 불과 열흘 남짓인데, 2제를 복약함에 또한 15첩을 넘지 않아 쾌차하였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라 기이한 만남이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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