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떠나자 英 군주제 흔들... 더욱 무거워진 '왕관의 무게'
2022.09.18 18:04
수정 : 2022.09.18 18:04기사원문
■개인사 복잡한 "예민한" 왕
지난 10일(현지시간) 73세의 나이로 영국 윈저 왕조의 5대 왕으로 즉위한 찰스 3세의 본명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마운트배튼윈저'다. 그는 4개의 이름 중에 찰스를 골라 왕호로 삼았다. 영국 역사상 첫번째 '찰스 1세'는 1649년 청교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될 당시 처형됐고 영국은 이후 약 10년 동안 공화국이었다. 영국의 왕정은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부활시켰으며 찰스 3세는 1685년에 찰스 2세가 사망한 이후 337년 만에 등장한 왕호다.
1948년 12월 영국 버킹엄궁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찰스 3세는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년 만인 1958년 왕세자에 올랐다. 그는 1970년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공군과 해군에 복무했다. 찰스 3세는 1981년에 다이애나와 결혼했으나 6년이 지나지 않아 당시 남편이 있었던 커밀라와 불륜 관계를 시작했다. 이후 1996년에 다이애나와 이혼했다. 커밀라는 2005년에 찰스 3세와 결혼했지만 왕세자빈 칭호를 받지 못했고 남편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야 공식적으로 왕비 칭호를 받았다.
찰스 3세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학창시절 기숙사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편지를 왕실에 보내기도 했으며 커밀라는 남편에 대해 "참을성이 없고 모든 일이 미리 끝나 있기를 바란다"고 표현했다. 커밀라는 남편의 70번째 생일 기념 인터뷰에서 찰스 3세가 '해리 포터' 흉내를 내며 아이들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장난기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찰스 3세는 10일 즉위식에서 선언문에 서명하기 전에 책상에 놓인 잉크병을 치우라며 짜증을 냈고, 13일 북아일랜드에서는 방명록에 서명하다 손에 묻은 잉크에 짜증을 부렸다. 전직 왕실 공보관이었던 줄리언 페인은 10일 인터뷰에서 찰스 3세가 낡은 구두를 고쳐 쓰고 먹다 남은 케이크를 보관했다 다음날 꺼내는 검소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현실 정치에 적극 개입
찰스 3세의 치세를 우려하는 이유는 그의 성격보다 정치적 행보 때문이다. 그는 2005년 인터뷰에서 "내가 특별한 지위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다"며 "이를 최대한 활용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왕세자 시절 400개가 넘는 단체의 후원자 혹은 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자신의 해군 퇴직 수당으로 '프린스 트러스트'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청년들을 도왔다. 그는 지난 2015년에 공개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개입하겠다고 시사했다. 찰스 3세는 2014년에도 "왕이 된다면 국민의 삶에 '진정어린 개입'을 하는 군주로서 역할을 개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흑거미 편지'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찰스 3세는 2004~2009년 사이 정부 부처 장관들에게 수십통의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 농업과 의료, 도시계획, 교육 등 주요 정부 정책에 간섭했다. 그는 자신의 구호단체에 대한 정부 지원을 요구하거나 대체의약품 시험 사용을 촉구했고 측근들을 정부 부처에 영입하라고 주문했다. 찰스 3세의 악필이 검은 거미를 연상시켜 흑거미 편지로 불린 해당 사건은 왕실이 국정에 개입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3세는 동시에 약 20년 넘게 영국 내각의 회의록을 열람했으며 2009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후원하는 단체에 지원금이 삭감됐다며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왕세자 시절부터 왕위 계승자를 제외한 다른 왕족에 대한 지원과 특혜를 줄이고 왕실 권한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찰스 3세는 이달 즉위 직후 연설에서 "나의 삶은 새로운 책임을 지면서 바뀔 것"이라며 "더는 내가 아끼는 자선단체와 사회 문제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없다"고 말했다.
■새 왕실 주시하는 공화파
영국 왕실의 정치 개입은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영국은 흔히 입헌군주국으로 알려져 있으나 왕과 내각, 국가의 주체를 다루는 단일한 성문 헌법이 없다. 영국 왕실의 권한은 각종 관습법으로 제한돼 있지만, 영국의 왕은 여전히 의회 해산권, 법률 승인권, 총리 임명권 등 절대 군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이론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영국 총리의 관저가 지금도 소박한 이유는 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신하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 1952년 즉위 이후 지난해까지 3650건의 법률을 재가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의회의 법률 승인을 거부한 것은 1707년이 마지막이지만 최근 해제된 총리실 기밀문서에 의하면 왕실이 비공식적으로 의회의 결정을 거부한 사례도 적지 않다.
영국 정부가 이러한 권력 구조에서도 안정성을 유지한 이유는 엘리자베스 2세가 70년 동안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정치 개입을 자제했기 때문이다. 그는 총리의 주기적인 국정 보고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4년 당시 노동당의 폴 플린 의원은 여왕의 침묵 덕분에 민주주의와 왕정이 공존할 수 있었다며 차기 국왕이 왕의 범위를 넘으면 "왕정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공화주의 단체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대변인은 일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지금 당장은 여왕의 서거로 공화제 논의를 시작하기 어렵지만 때가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여왕이 국민적인 지지를 받았다며 "찰스 3세는 그러한 수준의 존중과 존경을 물려받지 못했고 이는 전체적인 상황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3일 공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왕정 지지 여론은 64%로 10년 전(73%)에 비해 낮아졌으며 찰스 3세의 지도력에 대해서는 73%가 '잘할 것'이라고 답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