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70년, 어른의 정치

      2022.09.19 18:17   수정 : 2022.09.26 15:45기사원문
"저는 여러분 앞에 선언합니다. 저는 평생, 단명하든 장수하든 헌신적으로 여러분께 봉사할 것입니다."

1947년 4월. 이 짧은 문장을 담은 6분짜리 연설이 영국연방 전역에 생중계됐을 때 수많은 이들이 울컥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지 6세의 장녀, 스물한 살의 엘리자베스다. 세상을 향한 그의 첫 메시지였다.
공주 역시 쉰한살 학자가 쓴 이 원고를 보자마자 그 엄숙함에 눈물을 쏟았다.

공주 시절 한 이 맹세를 여왕은 잊은 적이 없을 것이다. 재위 25주년(1977년) 기념식에서 여왕은 다시 반복했다. "나의 판단력이 설익었을 때 한 맹세지만 후회한 적이 없다. 그때 했던 단 한마디도 철회하지 않겠다."

세상의 눈은 다시 영국으로 향하고 있다. 사랑을 찾아 국왕직을 내던진 형(에드워드 8세)을 대신해 뜻밖의 왕이 된 조지 6세. 그를 이어 왕으로 산 지 올해로 70년이다. 이를 끝으로 지난 8일 타계한 엘리자베스 2세를 향한 추모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19일 장례식엔 세계의 정상들이 총출동했다.

여왕의 삶은 '퀸 엘리자베스' 전기 작가 샐리 베덜 스미스의 말처럼 "한편의 서사시" 다. "앳된 소녀에서 위엄에 넘친 군주가 된 이후로도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그를 지켜봤다. 여왕은 자신의 삶을 위대한 배우처럼 연기해냈다." 저무는 제국이 영연방으로 재편되는 시기 여왕은 역사의 무대로 나왔다. 부친을 닮은 착실함을 밑천으로 헌신, 절제, 배려의 미덕을 무기 삼아 70년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싸움터로 안내할 수는 없다. 그 대신 다른 것은 할 수 있다. 내 마음과 헌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한 1957년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여전히 뭉클하다. 즉위 직후 "여왕은 우리의 전통과 영광의 상속자"라며 응원했던 이가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의 첫 버킹엄궁 방문 일화도 기억할 만하다. 블레어는 카펫 끝자락을 헛디뎌 여왕의 손을 붙잡은 채 넘어지고 만다. 여왕은 총리가 민망해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당신이 내 열 번째 수상이에요. 처칠이 첫 번째였죠. 당신이 태어나기 전이에요." 블레어는 훗날 사람을 편하게 해주려고 무척 애쓰는 여왕의 모습을 여러 번 증언했다.

여왕이라고 절망과 오점이 왜 없었겠나. 며느리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죽음은 그 결정판이었다. "더 슬퍼해야 한다"는 대중의 분노에 여왕은 맞서지 않았다. "세습 왕정과 선출된 정부의 공통점은 둘 다 국민의 동의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가 여왕이었다. 그 소신과 유연함이 위기를 이겨낸 동력이다.

통치하지 않는 왕이었으나 영향력을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여왕에겐 '의논할 권리, 권장할 권리, 경고할 권리'가 있었다. 정부 주요 현안과 극비문서를 담은 '가죽상자'가 총리실로부터 배달되는 시간이면 여왕은 지체 없이 상자로 향한다. 그렇지만 정치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봉사로, 외교로 은밀히 정치 보조를 맞췄을 뿐이다.

여왕이 국왕으로 성공을 거둔 원천은 "불필요한 정치 논란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어른다운 처신이 장수의 비결이었다는 말이다. 어른의 정치를 찾기가 너무나 힘들어진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여왕의 70년이 주는 교훈을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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