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이 판치는 헤어질 결심… 영화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2022.10.10 19:03
수정 : 2022.10.10 19:03기사원문
하지만 이런 꽉 짜여져 있는 일상은 그의 내면을 심하게 압박을 했고 언젠가 균열이 발생할 것이라는 심각한 징후를 예고했다. 그 용의자를 만나고서야 그 예고는 현실화됐다. 젊고 아름다운 용의자와의 첫 대면은 어떤 불길함의 전조였다. 거역할수 없는 힘으로 그는 형사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용의자를 도와주는 조력자로서의 입장으로 바뀐다. 이게 운명이라면 운명이랄까. 아님 용의자의 치명적인 유혹으로 인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형사는 용의자의 유혹을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유혹은 운명과 같은 길을 간다. '끝없는 길' 이게 운명과 유혹이 공유하는 지점이다. 특히 유혹의 강도가 치명적이라면 이를 거부하기란 불가능하다. 형사는 용의자가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걸 직감한다. 그러나 용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에는 멈칫한다. 이를 자꾸 지연시키는 그의 수사과정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증거 인멸을 알려주고 수사받을 상황을 방지할수 있는 방법을 가이드하는 등 형사로서 해서는 안될 행위를 벌인다. 이쯤되면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다. 기관차를 막을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충돌과 폭발일 것이다.
용의자의 치명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순수성이 결합하는 어느 지점에서 그 둘은 공모자가 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해석과 분석이라는 보기 드문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기존 영화의 문법에서 이탈한 낯설고 이질적 느낌을 주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의 머리를 감싸게 만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등에 관한 물음과 해석이 넘쳐난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집중력이 필요하다. 유혹과 아름다움, 그 끝의 파멸을 그리고자 한 건 아닐까 하는 괜한 생트집도 자연스레 제기된다. 아님 기존 영화의 판에 박힌 서사구조를 폭파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했을지도. 해석은 어느 측면으로도 가능한 법이다.
■해석의 과잉 시대
어찌보면 영화는 정답만 추구하는 세속의 가벼움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은 아닐까. 영화 스토리와 무관하게 영화를 이끌고 가는 사회적 맥락과 그것이 주는 의미 파악이 우선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암시한다면 말이다.
단 '정답은 없다'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정답을 추구하는 해석은 해석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수전 손택은그래서 그 유명한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명 비평집을 썼다.
오히려 해석의 과잉은 작품 본연의 가치를 훼손한다.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해석의 촉수를 집요하게 들이대는 것은 작품보다는 해석을 위한 해석일 뿐이다. 영화 자체가 보여주는 현상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지나친 해석들이 난무하는 것도 작품보다는 해석의 매력, 즉 작품을 여기저기 난도질해 작품을 해석가들의 수중에 복무시키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니체는 해석에 대해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광위의 해석을 했지만 이는 일종의 해석에 담긴 암호, 즉 일련의 법칙을 예증하는 의식적인 행위를 뜻했다. 비평가들은 원형의 변형이라는 이 해석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면서 예술작품 위에 군림했지만 해석은 역사적으로 신화가 지녔던 권위와 믿음을 깨부수는 행위로 나타났다. 예전 텍스트를 형식 그대로 수용할수 없게 되면서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다양한 현대적 변주들로 해석을 적용하면서 해석의 과잉이라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해석은 의미 위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덧붙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현대의 해석은 원문을 파고 들어가면서 파괴한다. 다시 말해 원문의 배후를 파헤치는 식이다. 잔인할 정도로. 손텍은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어떤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예술작품이라면 체험 주체의 공모, 즉 소비자 없이는 유혹에 성공할수 없다.
■'아다지에토' 그 스산한 느낌
'헤어질 결심'은 파격적 스토리와 함께 배경음악도 영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 등장한다.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말러가 실제 경험한 사랑의 파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그려낸 곡으로 유명하다. 마치 노을녘 소멸해가는 빛의 운명을 연상시키는 아다지에토는 형사와 용의자의 파국을 예고하는 전조다. 음악은 그래서 아름답고 처연하다.
현대사회에서 파국은 늘 예고돼 있다. 연인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등 전방위에 걸쳐 신호를 준다. 애써 모른 체하며 현실에 탐닉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런 성향이지만. 파국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를 멀리서 보면 코미디와 같은 인상을 준다. 비극은 너무 렌즈를 가깝게 들이대서 생긴 착시현상일지도 모른다. 인위적이고 감정의 고조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다. 사실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충동'은 살려고 하는 의지로 해석된다. 죽음을 뇌까리는 것은 반대로 삶의 애착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충동이라는 것이 생길리 없기 때문이다.
자꾸 이별을 하면서도 만남이 이뤄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헤어지기 싫은데 인생의 우연이라는 불가항력적 힘으로 헤어진다면 만남은 필연적이니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도처에 넘쳐난다. 용의자가 재혼을 하고 형사가 사는 도시로 이사를 온 것도 이런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힘에 이끌려서였을까. 다시 재회한 그 둘은 용의자의 전 남편이 죽은 산을 들러보고 과거 얘기를 하며 일체감을 느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재혼한 남편도 살인된 채로 발견되면서 용의자는 막다른 길에 몰린다. 결국 용의자는 자신의 삶의 행로를 아다지에토가 울려퍼지는 공간, 즉 무한한 공간인 바닷가에서 모래사장을 타고 몰려오는 파도를 맞으며 미소를 짓는다. 비로서 안식처를 찾은 사람의 표정처럼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게 삶을 마감한다.
인간의 엄청난 무질서와 늘 변함없는 바다의 항구성은 비교 대상으로 피의자가 미소를 짓는 장면은 인간이 가 닿을수 없는 무한을 동경한 결과일까. 현실은 누추하지만 이를 벗어나는 죽음의 과정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자기 임시일지도 모르겠다. 찰나의 경험으로 무한을 추구하는 인간의 경험은 그래서 값진 사례다. 그 최종 종착점이 죽음이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마저 행복의 척도로 승화할수 있는 실존적 결단이라면 그 죽음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일 테다.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예술작품은 늘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적 상투성에 직면한다. 형식과 내용 어느것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과 성격이 결정된다는 편견이 강하게 작용해서다. 영화 속의 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만큼 연출자의 의도나 동기가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은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작품의 통일성을 추구하면서 거리두기, 감정의 절제 ,낯선 극화 방식 등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전형을 만들어낸다. 그 둘은 분리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적절한 형식, 곧 스타일이 만들어질수 있느냐를 고민한 결과다.
상투성과 익숙한 서사구조라는 안정성을 허물고, 낮설고 복잡한 서사구조로 익숙한 인식의 회로를 전복시킨다. '헤어질 결심'은 인과관계를 보여주기보다는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 외에는 설명이 없다. 용의자가 남편을 왜 죽였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다만 남편의 폭력 등으로 살인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결국 인생은 두번은 없다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아우성친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두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두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형사와 용의자는 소멸해가는 바다에서 그들의 운명의 일치점을 찾은 걸까.
ktitk@fnnews.com 김태경 정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