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월정 계곡 유람하던 옛 선비 풍류… 다시 피어나 서원을 밝히다
2022.10.14 04:00
수정 : 2022.10.14 04: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함양(경남)=이환주 기자】 10년쯤 여행 작가를 했던 지인에게 가본 중 최고는 어디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전남 여수 안도라는 섬에 있는 '동고지마을'과 경북 영주 '무섬마을' 두 곳을 꼽았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가 좋아 근처를 지날 때면 무작정 1박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며 "하지만 최근 들어 관광지로 유명해지면서 전과 같지는 않다"고 했다.
■500년 전 선비도 반한 농월정 계곡
조선 전기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1501~1572)은 함양 농월정 계곡을 유람하고 시를 남겼다. 1000여가지 모양을 한 바위와 구름, 만 개의 베틀로 짠 듯한 푸른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는 "다는 묘사하지 말게나 / 내년에 은거하러 올지니"라고 썼다. 농월정 계곡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알지 못하도록 절제한 것이다.
함양은 '선비와 산삼' 고을로 유명하다. 선비의 마을 답게 정자와 누각이 100여개 넘게 있다. 정자와 누각을 따라 걷는 '선비문화탐방로'는 대표적인 관광 코스다. 농월정터-동호정-군자정-거연정을 잇는 탐방로는 나무다리를 따라 6.2㎞까지 이어진다.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는' '달을 마음먹은 대로 다루는 누정'이라는 의미다. 화강암을 따라 맑은 개곡물이 흐르고 보름달이 뜬 밤, 개곡물에 비친 달과 선비들이 술잔을 나누던 곳이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로 피난했던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장만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현재 정자가 있던 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동호정 앞에는 '해를 덮을 만큼 큰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과 짙푸른 숲,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거연정은 농월정과 함께 선비문화 탐방로의 시작 혹은 끝이 되는 장소다. 거연정에 다다르는 나무 다리 밑으로 계곡 물이 흐르는데, 계곡 물빛은 고려 제일의 청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깊고 푸르다. 수심이 수 미터 되는 계곡물은 너무도 맑아 바닥을 헤엄치는 민물고기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다. 함양군은 현재 생활관광 프로그램 '함양 온(on) 데이'를 운영 중으로 사전에 신청하면 동호정에서 전통 국악 공연도 즐길 수 있다. 소리 장인의 가야금과 함께 푸른 숲과 맑은 계곡 물을 보며 전통의 소리를 들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미스터선샤인' 속 그곳 개평한옥마을
함양읍에서 8㎞, 지곡면에 있는 개평한옥마을은 우리 한옥을 온전히 감상하기 더 없이 좋은 장소다. 지은 지 100여년이 넘는 크고 작은 한옥 60여채가 모여있다. 한옥마을이 유명한 일부 지역이 과도하게 상업화된 것과 달리 함양의 한옥은 실제 마을 주민이 거주하고 살아가는 장소다.
함양을 대표하는 문인 '일두 정여창'은 이황, 조광조, 이언적, 김굉필 등과 함께 '조선조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개평한옥마을에는 정여창의 생가인 '정여창 고택'이 있다. '정여창 고택'은 현재 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돼 있으며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과거 드라마 '토지' '다모' '미스터선샤인' '연모'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개평한옥마을은 골목마다 종가와 고가가 자리잡고 그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오담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등의 가택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현재 일로당 한옥스테이, 남계한옥스테이, 지리산 태고재 등 3곳에서 한옥민박을 운영 중이다. 최대 45명까지 숙박이 가능하며 전통 한옥에서 고즈넉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일로당과 남계한옥스테이는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주방시설과 세면시설을 갖췄다. 지리산 태고재는 경남 전통 식단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구절판, 인삼 튀김, 문어 숙회 등 자부심 넘치는 주인장의 손맛을 맛볼 수 있다.
함양에는 한옥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서원도 만나볼 수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일두 정영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1552년 설립됐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전국에 9곳에 달하며 그 중 으뜸이 남계서원이다.
■솔송주 칵테일, 압화 만들기, 산삼캐기까지
함양의 유일한 단점은 아직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KTX로 이동하고 이후 전세버스를 빌려 90분가량 더 달려 함양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이지만 함양군과 주민이 함께 운영 중인 다양한 체험행사를 통해 추억을 쌓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솔송주 칵테일 만들기 체험이다. 박흥선 솔송주 명인이 운영하는 체험장에는 문재인,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등 역대 대통령의 사인과 사진이 걸려있다. 솔송주는 청와대 만찬주로도 왕왕 사용됐다. 박흥선 명인은 하동 정씨 집안 며느리로 시어머니에게 솔송주 빚는 법을 전수 받았다. 솔송주 원액에 라임, 탄산수 등을 섞어 한 잔 마시면 이후 여정까지 발걸음에 알 수 없는(?) 힘이 실린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라면 '압화 체험'도 해볼만 하다. '압화'는 풀꽃과 들꽃 등을 압축시켜 액자나 부채 등에 붙여 작품을 만드는 체험이다. 카페를 겸하는 압화 체험 공간에서 야생 들꽃차와 함께 압화를 만들고 기념으로 가져가면 두고두고 함양을 추억할 수 있다.
산삼캐기 체험은 함양이 아니면 하기 힘든 귀중한 경험이다. 함양군의 생활관광 프로그램을 통해 사전에 신청해야 하며 인근의 산상 농장에서 실제로 산삼을 캐고 가져올 수 있다. 함양은 국토의 약 80%가 산으로 과거부터 산삼이 유명했다. 산삼캐기 체험의 경우 야생 산삼의 씨를 받아 키운 '산양삼'이다. 보통 10년 이상된 산양삼을 캐는 데 10년의 시간 동안 자란 산삼 뿌리는 기껏해야 어른 중지 만한 사이즈다. 필요한 경우 현장에서 저렴하게 산삼을 추가로 구매할 수도 있다. 1박 2일의 함양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함양 생활형 관광 체험 프로그램 이름처럼 마음속으로 '함양 또 온 데이'를 되뇌게 된다.
hwle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