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요한 기사단의 와인 샤또 가쟁..십자가, 기사단의 숨은 이야기는

      2022.11.06 12:57   수정 : 2022.11.10 11:38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서기 312년 10월28일 로마 북쪽 근방 삭사 루브라 평원. 갈리아 지방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콘스탄티누스 앞에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막센티우스의 13만 대군이 막아섰다.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벌이는 운명을 건 전투였지만 결과는 뻔해 보였다. 막센티우스의 병력은 콘스탄티누스보다 2배 가까이 많은데다 오랜 행군에 지친 초췌한 모습의 콘스탄티누스 군대와는 달리 사뭇 여유있고 당당했다.

한참을 노려보던 콘스탄티누스가 기병을 이끌고 앞으로 질주했다. 팽팽한 접전이 잠시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승부가 갈렸다.
북쪽 전장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 노장들이 평화로운 이탈리아 반도에서 머물던 막센티우스 병사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이 밀비우스 다리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다급한 나머지 길이 135m, 넓이 8m의 다리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서로 밟혀 죽고 다리에서 떨어진 병사는 테베레 강에 빠져 죽었다. 한참이 지나자 콘스탄티누스가 강에서 건져올려진 막센티우스의 목을 잘라 창 끝에 꽂자 큰 함성이 울렸다.


'예수의 13번째 제자'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이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두고 "천년 동안 이어질 중세로 가는 문을 연 전투이자 기독교 세계를 향한 첫 발자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로마로 입성해 로마제국 통합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이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고 로마 시내 뿐만 아니라 제국 곳곳에 교회를 건설합니다. 기독교가 비로소 300년 만에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 전투 장면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표식인 '라바룸(Labarum)'이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치르기 며칠 전 막사에서 꿈을 꿉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너는 이 표징 아래 승리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깹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라바룸을 그려내고 이를 군기에 부착하게 합니다. 라바룸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그리스 문자 'ΧΡΙΣΤΟΣ'의 처음 두 글자 '카이(X)'와 '로(P)'를 겹쳐놓은 것으로 '카이로의 십자가'라고 불립니다. 최초의 십자가 표식입니다.




■샤또 가쟁에 붙은 성요한 기사단의 십자가 문양
기독교가 지상으로 나온 이후 십자가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합니다. 우리 눈에 가장 익숙한 모습의 십자가는 라틴 십자가로 세로쪽 가지가 긴 모양입니다. 그리스 십자가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습니다. 적십자의 상징도 이 형태입니다.

교황의 십자가는 또 다릅니다. 라틴 십자가의 표식에서 가로 윗부분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횡선이 더 붙습니다. 총 세 개의 횡선은 교황이 쓰는 모자 티아라를 상징합니다. 반면 대주교의 십자가는 가로 횡선이 2개입니다. 동방교회 십자가는 대주교 십자가의 문양 아랫쪽에 예수의 발이 못박힌 판을 의미하는 비스듬한 작은 횡선이 더 그어져 있습니다. 최초의 교황인 베드로의 십자가는 역십자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안드레아 십자가는 X자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세운 예루살렘 왕국의 십자가는 중앙에 큰 십자가가 위치하고 나뉜 네 공간에 작은 십자가 4개가 위치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하면 볼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성전 기사단의 십자가는 예루살렘 십자가에서 작은 십자가가 없는 중앙에 위치한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성요한 기사단 십자가는 가로 세로의 끝이 갈라진 독특한 모습으로 아말피의 십자가라고도 불립니다.

프랑스 보르도 뽀므롤(Pomerol)의 유명 와인 '샤또 가쟁(Chateau Gazin)'의 라벨과 병목에는 '성요한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의 십자가 문장이 박혀 있습니다. 뽀므롤은 12세기부터 프랑스 혁명 때까지 성요한 기사단의 지배 하에 있던 곳입니다. 가쟁 와이너리는 이베리아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순례자들을 맞기 위해 성요한 기사단이 세운 호스피탈 드 뽀므롤(Hospital de Pomeyrols)에서 유래했습니다. 호스피탈 드 뽀므롤은 뽀므롤 병원이라는 의미로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걷다가 다친 사람들도 치료해주던 병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쟁의 세컨 와인은 '호스피탈레 드 가쟁(L'Hospitalet de Gazin)'으로 아예 그 기원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세계를 떠받치는 두 기둥..13일의 금요일 유래도
성요한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Temple Kinghts)은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로 칭송받았지만 그 태생과 활동은 많이 달랐습니다. 성요한 기사단은 이탈리아 해상강국 아말피의 대상인 마우로가 1050년 경 이집트 파티마 왕조에게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 예수성묘교회 앞에 구호소를 짓고 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유럽인에 있어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은 무려 4200km(파리 기준)나 떨어진 곳인데다 이슬람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거의가 몸이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호소의 기사들은 대부분 의학교 출신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후 성요한 수도회에서 운영을 이어받으면서 국적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게 됐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끝난 뒤에는 로도스에서 몰타로 거처를 옮기며 활동하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해 쫒겨난 후 1834년 로마에 본부를 세우고 지금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전 기사단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인 1118년 창설됐습니다. 전투와 경호를 위한 기사단으로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정복지에서도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상하는 이교도에게는 정말 무서운 조직이었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1139년 성전 기사단을 교황 직속 조직으로 두고 납세를 면제하고 "국가나 왕 등 세속 권력이 간섭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성전 기사단은 무소불위의 권력까지 얻게 됩니다. 이 덕분에 성전 기사단은 지부격인 관구회당이 서유럽에서만 9000개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1291년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 아크레가 점령당하면서 중근동에서 돌아온 후 1307년 어느 날 한 순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도 가톨릭 세계에서 십자군 원정에 가장 열을 올렸던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손자 필립 4세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합니다. 루이 9세는 6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는데 이 때 성전 기사단이 막대한 자금을 빌려줬습니다. 결국 이 빚은 필립 4세까지 이어졌는데 필립 4세는 이 빚을 갚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기부금으로 거대한 재산을 축적한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탐 낸 교활한 왕이었습니다.



1307년 9월 필립 4세는 직접 봉인한 비밀문서를 프랑스 전국 지방장관들에게 일제히 발송하고, 반드시 특정일 특정 시간에 열어보도록 했습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문서를 열어본 전국 지방장관은 일제히 성전 기사단 지부인 관구회당을 습격합니다. 순식간에 성전 기사단 대부분이 체포 당하고 그들의 재산도 모조리 압수당합니다. 그 날이 1307년 10월13일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서양에서 '13일의 금요일'이 불길한 날이라는 믿음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필립 4세는 성전 기사단을 이단재판소에 넘기며 우상숭배, 동성애, 금융부패 등 무려 127가지의 죄목을 들었습니다. 결국 기사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고 수장인 자크 드 몰레 총장과 일부 남은 기사들은 1314년 화형에 처해져 완전히 와해됩니다.

■프리랜서, 토너먼트, 백마탄 왕자 등 현재까지도 많은 흔적
중세는 신앙과 기사의 시대였습니다. 중세의 꽃으로 불리는 기사 계급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이 지역을 차지한 프랑크 왕국은 봉건제와 장원제라는 독특한 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쪽엔 바이킹, 남쪽에는 이슬람, 동쪽엔 마자르라는 강력한 세력이 수시로 침략해왔지만 왕권은 영토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외부에서 적이 침입하면 왕이 군대를 보내는 것보다 적이 침입해 유린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각 지방마다 영주를 지정해 자치권을 주면서 자체적으로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왕은 영주에게 충성맹세와 납세 서약을 받고 토지를 하사하고, 영주는 이를 위해 기사를 모집하고 주종 계약을 맺었습니다. 기사는 대부분 귀족 자제들이었으며 이들은 소년 시절부터 무예와 학문, 예의범절까지 익히고 난 후 나중에 실력을 인정받아 영주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중세 역사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 기사 계급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자유 계약직을 뜻하는 '프리랜서(Freelancer)'도 중세 기사의 마상 시합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마상 시합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랜스(Lance)'라는 창을 들고 서로 마주보고 달리며 상대를 찔러 떨어뜨리는 경기였습니다. 즉, 프리랜서는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창(기사)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됐습니다. 또 마상 시합을 '주스트(Joust)' 혹은 '토너먼트(tournament)'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한번 지면 바로 탈락하는 승부를 뜻하는 토너먼트 방식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유럽 동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도 봉건제의 산물입니다. 프랑크 족은 '장자 상속' 전통이 유독 강했습니다. 아무리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더라도 장남이 아니면 성인이 돼 성밖으로 내쫒겼습니다. 달랑 몸종 하나 데리고 말을 타고 산속을 떠도는 왕자들은 주변국 왕이나 영주의 사위가 되는 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습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구세주'가 아닌 사실상 '거지'였던 것이죠. 이 때문에 돈이 궁해진 왕자들은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용병 자리가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페트뤼스, 레방질과 이웃한 뽀므롤 최고의 가성비 와인
보르도 뽀므롤의 유명 와인 '샤또 가쟁 2013' 코르크를 열어봅니다. 블렌딩은 메를로(Merlot)를 기반으로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등을 섞지만 2013 빈티지는 메를로 100%로만 만들었습니다. 2013년 날씨가 워낙 좋지않아 좋은 포도만 골라 생산량을 4만9000병 정도로 대폭 줄여 만든 와인입니다.

와인 잔에 따라진 모습은 10년이 지나는 와인이라 테두리가 이제 막 가넷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지만 코어 부분은 굉장히 검은 색깔을 띱니다. 잔에서는 검은 과실 향이 먼저 훅 치고 들어오고 이어 연유 향, 오크 향, 감칠맛 나는 향이 반깁니다. 가끔 보르도 특유의 흙냄새와 까베르네 소비뇽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매콤한 향이 스쳐갑니다.

입에 넣어보면 아로마는 역시 검은 과실 향이며 아주 좋은 산도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색깔과 다르게 질감은 미디엄이나 미디엄 플러스 정도로 가볍습니다. 타닌도 처음에는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다가 30분 정도 지나니 갑자기 거칠고 두꺼워집니다.
피니시는 굉장히 길게 가져갑니다. 마지막에 남는 향은 검은 아로마와 초콜릿, 커피 향으로 잇몸을 파고드는 타닌도 인상적입니다.


뽀므롤의 가성비 와인으로 꼽히는 샤또 가쟁은 보르도 최고가 와인 샤또 페트뤼스와 레방질 밭과 바로 붙어있는 와이너리입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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