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가 이리 높은 줄 몰랐다"...방청객 된 판사들
2022.11.06 15:15
수정 : 2022.11.12 01:1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법대 위에 앉은 판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매년 하반기 형사 재판부 판사들 간 재판 교차 방청을 하고 있다. 판사가 다른 재판부 재판에 들어가 재판 진행 노하우를 배우고, 법정 언행을 서로 점검하는 차원이다. 서로의 재판을 방청할 기회가 사실상 전무한 판사들은 무엇보다 재판 방청을 통해 소송 당사자들의 입장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법, 다음 달 11일까지 교차 방청 실시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은 법정언행연구 소위원회 주도로 지난달 17일부터 오는 11일까지 법원 내 90여명의 판사를 대상으로 형사 재판 교차 방청을 실시하고 있다. 형사 단독·합의·항소부 총 50여개 재판부를 세 그룹으로 나눠 같은 그룹에 속한 재판부 2곳 이상의 재판을 방청하는 방식이다. 판사들은 재판을 방청하고 나면 '법정 방청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소위원회에 제출하고, 이는 방청에 참여했던 판사들에게도 공유된다. 익명으로 평가하게 되는 체크리스트에는 판사의 발음과 태도에 대한 평가부터 소송 관계인에게 적절한 호칭과 경어를 사용하는지까지 다양한 항목이 담긴다. '판사의 말투가 명료했다', '소송 당사자와 눈을 잘 마주쳤다', 진술거부권을 명확하게 고지했다'는 긍정적 평가부터 '말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쟁점 정리를 따로 해주지 않아 재판 진행이 효율적이지 못 했다'는 평가까지 다양한 평가들도 이뤄진다.
재판 방청에 참여했던 판사들은 방청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판사들 간 서로의 재판을 방청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있어 재판을 방청할 기회를 갖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판사들은 무엇보다 "법대 위에서 본 법정 분위기와 방청석에서 본 재판은 많이 달랐다"고 말한다. 재판을 진행할 때와 달리 방청석에서는 소송 당사자들의 압박감과 소송의 무게감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한 판사는 "정작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보니 나도 판사임에도 법대 위에 앉은 판사가 멀고 무섭게 느껴졌다"며 "법대 위에서는 법정 분위기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아래에서는 검사와 피고인이 치열하게 다투는 전쟁터라는 게 와닿았다"고 전했다.
서울중앙지법의 또 다른 판사는 "방청석에 앉아보니 판사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가 재판정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변호인 옆에 앉은 피고인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평소 보이지 않았던 재판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소송당사자들의 입장 더 잘 이해하게 돼"
판사들은 특히 재판 방청을 통해 "법정 권위를 세우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한다. 방청에 참여했던 한 판사는 "법정 구조가 이미 판사 중심으로 짜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특별히 법정 위엄을 세우기 위해 엄숙하게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당사자들이 편하게 입장을 밝힐 수 있도록 부드럽게 재판을 진행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재판 방청을 통해 법정 언행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에 무엇보다도 공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각급 법원 차원에서 이 같은 법원 교차 방청을 실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각급 법원 차원에서 방청 기회를 따로 마련하지 않는 한 서로의 재판을 방청할 기회가 사실상 전무하다 보니 스스로 재판 진행 방식이나 법정 언행등을 객관화하기 쉽지 않다. 소송을 하는 당사자 입장이 어떤지 직접 경험하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발표하는 '법관 평가'에는 고압적인 판사들의 법정 언행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위축시키는 사례가 매년 등장하는데, 재판 교차 방청이 일종의 법원 차원에서 마련한 개선책이 된 셈이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판사들은 법대 아래에서 판사를 바라보는 소송 당사자들의 입장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며 "교차 방청 기회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