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역사적 사실vs허구 "그거, 팩트입니다"

      2022.12.24 04:00   수정 : 2022.12.24 04: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뮤지컬영화 ‘영웅’이 21일 개봉한 가운데 극적 재미를 위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허구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특히 영화 후반부 안중근 의사와 우정을 나누는 일본인 통역관 캐릭터를 두고 극적 효과를 노린 가상의 인물이 아닌지 궁금해 한다.

윤제규 감독은 “극중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일본인 통역관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며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들 중에서 마두식-마진주 남매와 궁녀 출신의 정보원 설희만 가상 캐릭터다.

나머지 동지 3인은 실존 인물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고 말했다.

“독립군 막내는 실제 17살에 불과했고 명사수 조도선은 러시아 여인과 결혼하여 실제 세탁소를 운영했다.
단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아내와 키스신을 넣은 게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윤감독은 “방학을 맞이한 학생들뿐 아니라 가족 관객 모두가 함께 보고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짧게나마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를 위해 영화의 톤앤매너도 "가족 관객을 고려해 너무 무겁지 않게 잡았다"고 부연했다.

동명 뮤지컬이 원작인 ‘영웅’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생전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다.

■ 안중근 의사 직업 아셨나요?

윤감독은 “역사 공부가 수학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게 우리나라 교육이 개탄스럽다”면서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원작 공연에 없는 내용을 새로 추가했다”고 말했다. 또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 애국심이 커졌다"고 부연했다.



극 초반 안중근의 아내는 독립 자금 대느라 쌀집하다 망하고, 학교하다 망해 남은 돈이 없다면서 자신의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윤감독은 “아내의 하소연을 통해 안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 모든 남편은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나, 저도 물론이고, 안 의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극중 안중근 의사는 독립 운동을 함께하는 청춘 남녀가 부부로 위장하기 위해 팔짱을 끼자,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말한다. 윤감독은 "호불호가 있는 대사인 걸 나도 안다"며 "근데 내 생각보다 관객들이 많이 웃음을 터뜨리더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는 할아버지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이 부유했다. 문무에 능했는데 특히 말 타기와 사냥에 능했고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했다가 국내 실력 양성이 중요하다는 선교사의 충고로 귀국했다. 1906년 석탄상회를 경영하다 정리한 뒤 삼흥학교 등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나섰다.

■ 회령전투서 일본군 포로 풀어줘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



안중근 의사는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에 나섰고, 연해주 의병운동을 일으킨 뒤 대한의군참모중장에 임명됐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 자격으로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제3차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처참하게 패배했다.

영화는 이 회령 전투신을 규모감 있게 다룬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군 포로를 풀어주는 일화 역시 다뤄진다.

윤 감독은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을 하고 제 한목숨 바치기로 결정하기에 앞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회령전투 참패다”라고 짚었다.

안중근 의사는 동지들의 질책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일본군을 풀어준다. 원래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포함돼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고 설득했다. 이런 안중근 의사의 대의에 격노한 장교들 몇은 안중근을 떠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윤감독은 “대의명분을 갖고 풀어줬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가 됐다”며 “앞선 두번의 전투 승리로 따르는 부하가 많았었는데, 횡령전투 패배로 아끼던 부하를 다 잃었다”고 짚었다.

■ 독립운동가 대부 최재형 "기억합시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3월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혈서를 쓰고, 조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 평화 유지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당시 이들은 최재형 선생 밑에서 지원과 훈련을 받았다. '한인 부자' 최재형은 안중근뿐 아니라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한 대부분의 민족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윤감독은 “최재형이 기여한 바가 컸다. 독립운동가의 대부 최재형을 많은 사람이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였던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당시 한인사회에서 러시아 이름인 ‘최 표트르’의 애칭인 ‘최 페트까’ 혹은 ‘최비지깨’로 불리며 오랫동안 존경을 받았다. 러시아 정부의 두터운 신뢰도 얻어 1893년 러시아 최초로 우리의 면장·읍장에 해당하는 도헌에 선출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20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했다.

■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가 모델"

일본인 지바 도시치는 극중 일본인 통역관의 실제 모델이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일본인 간수 지바 도시치와 특별한 정을 나눈다. 그는 안 의사를 증오했으나 곁에서 지켜보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과 인품에 감복해 후에는 존경하고 평생 그를 기렸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 지바 도시치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유묵을 남겼다. 유묵은 지바 도시치의 조카가 소중히 보관하다가 1979년 안중근 탄생 100주년에 한국에 기증했다.

이후 2년 뒤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대림사에 ‘위국헌신군인본분’이 새겨진 안중근 현창비가 절 앞마당에 세워졌다. 그리고 안중근 탄신일(9월2일) 무렵이면 오늘날까지 이곳에선 안중근을 기리는 법요식이 열린다.

■ ‘누가 죄인인가’ 열창 법정신 “고증에 충실하려 노력 "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사살,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중근은 이때 개인이 아닌 대한의용군사령관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 주장했고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영화는 이토 저격 후 법정신을 공들여 찍었다. 윤감독은 “애초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처단하고 자결할 생각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동양평화사상을 알릴 목적이었다. 이토가 죽었으니까,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그야말로 세계적 재판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재판한다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누가 죄인인가'를 부르는 법정신에서 안중근 의사와 동지 3인은 죄수복 대신에 일반복을 입고 있는데 고증에 따라 준비한 의상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연기한 일본 뮤지컬계의 정성화인 재일교포 배우 김승락씨와 안중근을 뒤쫓는 일본 순사 역할의 한국배우 김중희를 제하고 일본인 간수, 일본인 검사 등 다 일본 배우를 캐스팅했다.
김중희 배우는 일본서 거주한 바 있어 일본어가 원어민 수준이다.

당시 법정에는 한국인의 입장이 불허돼 전부 일본인이었고, 재판을 취재한 서양인 기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또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나온 뒤 탔던 마차는 당시 사이즈 그대로 재현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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