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국도 첫 관문 '무악재'… 가파른 고갯길 따라 순응한 장터거리

      2023.01.15 19:13   수정 : 2023.12.19 14:41기사원문
서울 경복궁에서 가장 가까운 고개인 무악재. 그 시작과 끝에는 오래된 전통시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무악재에서 북쪽으로는 인왕·홍제시장이, 남쪽 끝에는 영천시장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 있다. 그 유래를 찾아가보면 조선시대에 한양 도성 서북쪽의 무악재 고개를 오가던 관리, 상인, 나그네들을 위한 병점(떡집)이 시작이다.



무악재 아래 영천장에선 한양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먼 길을 떠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을 위한 먹거리를 파는 떡집들이 많았다. 중국을 가기 위한 사신들은 무악재를 넘은 뒤 조선시대 첫 번째 국립여관인 홍제원에 머물렀다.


무악재 고개를 지나는 통일로가 얼마 전까지 의주로로 불렸던 것이 바로 평양북도 의주로 향하는 도로였기 때문이다. 현대로 치면 서울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국도의 첫 고갯길이 무악재였다.

또 북쪽에서 땔감을 싣고 와서 내다 파는 장터도 크게 섰다. 고양과 파주의 나무꾼들이 서울 장안에 팔 나무 짐을 지고 넘던 고개가 무악재였다. 영천장에서는 연탄이 보편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까지 땔감을 팔았다.

떡과 땔감을 팔던 영천장은 사라지고 지난 1960년대 영천시장이 들어섰다. 영천시장에는 명맥을 잇는 방앗간과 떡집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한 때 영천시장 방앗간에서 판매하던 떡들이 서울 동대문 등 각지에 공급되던 떡집 호황 시절도 있었다.

떡 대신 빵과 케이크가 간식으로 보편화되면서 최근에는 영천시장 내 떡집은 명맥만 남아 있다. 그 대신 꽈배기, 떡볶이, 튀김, 옛날 통닭 등 간식거리를 파는 곳들이 남았다. 떡집과 꽈배기 가게중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 자리 잡은 곳도 있다. 최근에는 도심 시장에서 찾기 쉽지 않은 전집과 간장게장 가게도 영천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독립문과 함께 한 영천시장
영천시장은 '독립문 영천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천시장을 옆 도로를 건너면 역사적 명소인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를 바로 만날 수 있다. 유적지가 되기 전까지 서대문형무소를 찾는 수감자 가족들이 인근 떡집들을 많이 찾았다.

독립문이 이곳에 위치한 것에는 사연이 있다. 무악재 끝자락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조선의 왕이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자리했다.

무악재 고개를 넘은 중국 사신들은 영은문 앞에 마중 나온 조선 왕의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전하여 조공 관계가 폐지되고 조선의 자주독립이 선언된 것을 계기로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이 항일 유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반중(反中)의 산물인 셈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독립문이 그대로 유지된 것도 이 때문이다. 매국노 이완용도 독립문 건립에 관여했다.도로 하나를 두고 인접한 영천시장과 독립문은 원래 더 가까웠다.

독립문은 지난 1979년 금화터널 고가에 자리를 내주고 75m 서북쪽으로 옮겼다. 원래 독립문이 있던 터는 지금은 도로 사거리 한복판이 됐다. 도로 밑에 땅을 파고 '독립문지'라는 표시만 남겼다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과 달리 위상이 작았던 한국의 독립문은 처음 세워졌던 터마저도 빼앗긴 셈이다.

좁고 험준한 고개였던 무악재는 조선시대에 호랑이가 많이 출몰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조정에서는 이 호환을 막기 위해 지금의 서대문 독립공원 자리에 군사를 주둔시켜 행인 10여명이 모이면 앞뒤로 호위해 보호해 줬다고 한다. 사람을 모아 넘는 고개라고 해서 '모아재'라고 불렀다. 명나라 사신인 동월은 무악재를 겨우 말 한 필만 지날 수 있는 험준한 곳이라고 표현했다.

무악재 고개 양 옆으로 인왕산과 안산이 자리 잡고 있다. 무악재가 마치 두 산 사이에서 움푹 파여 들어간 골짜기처럼 느껴진다.

'인왕산 호랑이'는 도성 안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떡 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라고 했다는 전래동화속 호랑이를 떠올리게 한다.

영천시장 인근 안산에는 수맥이 좋아 옛부터 약수터가 유명했다. 영천은 영검한 샘물이 솟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호랑이는 물이 많은 습지를 좋아한다. 조선시대까지 무악재 인근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 배경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험준하고 폭 7m에 불과하던 무악재를 바꿔 놨다. 산을 깎아 표고를 대폭 낮추고 폭 35m에 6차로 만들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고개 언덕에는 박정희 친필 표지석이 세워졌다.



■조선 왕의 눈물 젖은 무악재

무악재는 조선 개국 초기 개성과 한양으로 왕래가 잦았던 무학대사가 자주 다녔던 길이라 하여 무학현이라 불리었으며 사천(홍제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다 하여 사현이라 부르기도 했고 안산 아래 있다 하여 안현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또한 무악재는 조선시대 임금들에게는 눈물의 고개이기도 하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음력 4월 그믐날 밤, 빗줄기가 드센 캄캄한 어둠을 뚫고 궁을 빠져나갔다. 임금이 돈의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고 홍제원에 이르자 동이 텄다. 임금과 신하들은 물론 후궁·내시·궁녀·근왕병들도 흠뻑 젖고, 가마 행렬은 진흙탕속에 주저 앉았다.

또한 인조반정은 무악재 북쪽 내리막 끝에 자리 잡은 홍제원에서 시작됐다.

최명길, 김자점, 이괄, 김경징 등이 의기투합해 병력 1천여 명을 홍제원 터에 집결 시키고 도성으로 진격하여 광해군을 축출했다. 해를 넘긴 뒤에 인조 반정에서 선두에 섰던 무관 이괄은 2등 공신으로 책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인조를 몰아내기 위해 무악재를 다시 넘었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안에 여자를 두고 술을 파는 색주가를 허가하지 않았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세종 때 홍제원에 처음으로 색주가 촌을 두게 했다. 중국으로 향하는 양반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고 환송연을 베풀어 주는 것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훗날 술을 마시지 못하는 행인에게는 떡을 팔려는 떡집도 생겨났는데 떡 중에서도 인절미를 잘 만들었으므로 '홍제원 인절미'가 특히 유명했다.

홍제원 안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당시 생명과 같은 정조를 잃은 부녀자들을 마냥 환대할 수 없었던 조정은 '과거를 씻는다'는 의미로 이들에게 연못에서 몸을 씻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진상가·인왕시장 복합개발 '꿈틀'

홍제원터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서 홍제역 인근에 인왕시장과 유진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유진상가는 현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유진상가는 지난 1970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대전차 방호목적으로 홍제천을 덮어 지어졌다. 그동안 지하공간에는 아무도 다닐 수 없었는데, 최근 서울시가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 꾸며 개방했다.

인왕시장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많이 찾는 전통시장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을 유진상가에서 부터 시작했다. 시장에 당선된 뒤에도 유진상가 인근 홍제골목상점가와 인왕시장 일대를 찾았다.

유진상가·인왕시장 통합개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유진상가는 1970년 홍제천을 복개해 지은 주상복합 아파트로 2000년대부터 개발 소식이 꾸준히 나왔다.

앞서 유진상가는 1992년 내부순환로 건설 당시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보상 문제로 일부 철거에 그친 바 있다. 이후 2003년 일대가 홍제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되고 2010년 조합 설립까지 마쳤지만 홍제초등학교 일조권 침해 문제로 사업시행 인가 신청이 수차례 반려되다가 2017년 결국 정비구역에서 해제됐다.

홍제역 일대 유진상가와 인왕시장은 복합 개발론도 대두중이다.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은 유진상가와 인왕시장을 철거한 후 4만5천㎡ 부지를 통합 개발해 5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 등을 조성하는 것을 민선 8기 주요 과제로 내세웠다. 이 구청장은 최근 오세훈 시장과 만남을 갖고 유진상가 개발에 관한 긍정적인 논의를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 구청장은 최근 주민들을 위한 신년사에서 "복합적인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서울시와 국토교통부 등 관계 기관과 긴밀한 협의를 지속하고 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연중기획으로 '길 위에 장(場)이 선다'를 연재합니다.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전통시장, 근대 상가, 지역 특화 '시그니처 상권' 등 다양한 팔도 상권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rainman@fnnews.com 김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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