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재미있는 진짜 이유

      2023.02.08 15:44   수정 : 2023.02.08 15:57기사원문

"한 남자를 사랑하면 60매의 단편소설을 쓸 수 있다. 나는 최근에야 이런 법칙을 알았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사랑을 하는 건지, 사랑을 하기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연애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

"


[파이낸셜뉴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일본 3대 여성 작가라고 불리는 야마다 에이미는 그의 책 '솔뮤직 리버스 온리'에서 위와 같이 썼다.

창작의 원동력이 되는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9명의 여신이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 혹은 '소설가'가 된다.
설령 그가 슬럼프에 빠진 작가일지라도 새로운 사랑은 죽어버린 예술혼에 다시 불을 지피기도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사랑을 훔쳐보고 상상하기

지난달 28일,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연인과의 러브스토리를 기반으로 쓰여졌다는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많은 독자들은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읽을 때 책 표지에 있는 작가의 사진을 보고 혹시나 소설 속 화자가 작가와 동일인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소설(희곡)이란 장르는 그 근본이 허구(거짓말)를 기반으로 하므로 작가는 진실로 위장한 거짓에 숨거나, 거짓을 내세운 진실을 보여주는 장난으로 독자와 줄다리기를 할 수 있다. 하물며 영국인들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셰익스피어의 사랑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말해 무엇하랴.

'셰익스피어 인 러브' 한국 초연을 앞두고 몇 가지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먼저 400년도 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의 사랑 이야기가 2023년 대한민국의 관객에게 유효할까란 질문이다. 스토리와 대사의 많은 부분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겹치는 만큼 자칫 잘못하면 식상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안방 극장에서 이미 유명한 정소민, 채수빈, 김유정 등 파격적인 캐스팅을 했지만 VIP 티켓 가격이 연극 최초로 10만원을 넘긴 것도 부담이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파크, 예스24에서 8일 기준 모두 평점 9.4점을 기록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송한샘 프로듀서는 "작품이 기대에 못 미쳤다면 개막 후에도 가격 논란이 있었을 것이지만 많은 후기들에서 '만족한다'는 반응"이라며 "뮤지컬 못지 않은 무대 장치, 조명, 캐스팅 등 불가피한 측면에서 가격을 책정했다"고 말했다.

개막 이틀째인 지난달 29일 관람했을 때 윌 셰익스피어는 이상이가, 비올라는 채수빈이 캐스트로 올랐다. 총평은, 재미있었다.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영화든 2시간이 넘는 관람 시간이 끝나고 관객에게 '재미있었다'란 전체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배우의 연기, 긴장과 이완, 적절한 유머, 화려한 연출 등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우연적인 요소(관객의 기분이나 대장의 상태까지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난 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연극이 왜 재미있었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역할과 사랑에 빠진 배우들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재미있는 작품이 된 것은 크게 △클래식이 갖는 매력적인 이야기 △배우들의 열연 △치밀하게 짜여진 연출과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스텝들의 노력 등등 여럿이 있다.

송한샘 프로듀서는 먼저 고전이 갖고 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의 힘과 해석의 다양성(다의성)을 꼽았다.

"클래식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치를 유지하는 작품이다. 작품이 각자의 관객에게 닿아 배경지식을 토대로 번역되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사랑 이야기에 눈물 흘리고, 누군가는 나도 이런 꿈이 있었지 깨달으며 이상을 좇아 부딪혀 보자고 생각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셰익스피어 시대는 이렇게 연극을 만들었구나,라고 느낄 수 있다. 하나의 텍스트지만 모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작품을 올린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의 무대 연출은 초대형 뮤지컬에 버금갈 정도로 쉼 없이 움직이고 변형된다. 22명 배우들의 살아 숨쉬는 연기도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라는 게 송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영화가 소위 편집의 미학이라면 이번 연극은 무대 위에서 22명의 배우들이 1000명의 관객을 상대로 끊임없이 각자의 연기를 하게 된다. 조명, 무대 연출, 안무 디자이너가 합심해 누가 봐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연출하고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게 수많은 장치를 넣었다."


하지만 이 연극이 재미있는 진짜 이유는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를 현실 무대로 옮긴 배우들 역시 역할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많은 뮤지컬, 연극의 제작 발표회에서 모든 배우들이 "배역과 사랑에 빠졌다" 말하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기자간담회에서 선 8명의 주연, 조연 배우들은 모두 행복하게 연습하고 공연하고 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비올라 역의 정소민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나에게 '숨구멍'이다. 요즘 제가 숨쉴 수 있고 함께 무대에 서는 배우 모두 소중하다"고 말했다. 김유정은 "첫 공연날 아침에 '오늘이 첫 공연이라 너무 좋다'는 느낌이 아니라 오늘 공연을 하면 공연을 할 수 있는 하루가 지나가는구나라는 생각에 아쉽고 슬펐다"고 했다. 채수빈은 "모두가 하나 되는 느낌이 좋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 그리고 무대 위의 배우들. 연극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셰익스피어를, 그리고 그의 연인 비올라를 연기한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로미오를, 줄리엣을 연기한다.
무대 위 배우들이 '실제로 사랑에 빠진 듯 보였던 것'은 그들의 연기력이 훌륭했기 때문이리라.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3월 26일 마지막 무대를 끝마치고, 신문 혹은 방송의 연애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내려온 두 배우의 열애설 기사를 보는 걸 상상해 본다. '마크 노먼'과 '톰 스토파드'가 상상으로 1990년 후반에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썼던 것처럼.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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