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용님 의견은?"...'님' 호칭, 대기업서도 '대세'

      2023.02.14 05:00   수정 : 2023.02.14 05: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그동안 스타트업의 점유율로 여겨졌던 직급 파괴와 이니셜 및 별명 호칭이 업종을 불문하고 대기업에서도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는 국내 대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어(추격자)'에서 각 산업의 시장 선도자로 나서면서 창의적 아이디어가 곧 미래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자유롭고 혁신적인 조직으로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재계 맏형' 삼성전자도 '님'자 쓴다
"변화를 향한 길은 언제나 낯설고 어색하지만 방향이 옳다는 믿음으로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 우리가 바라보게 될 풍경은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철학기반, 수평호칭 문화정착을 위해 경영진, 임직원 모두의 관심과 실천을 부탁드린다"
- 삼성전자 사내공지 中 일부

1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1일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위해 직원 간에만 적용하던 '수평 호칭'을 경영진과 임원으로 넓히기로 하고 사내에 공지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경영진끼리도 수평 호칭을 사용하고, 경영진이 참석하는 타운홀 미팅이나 간담회, 임원회의 등에서도 수평 호칭을 쓰도록 했다.

JY, JH, HH, KH 등이 임원진 회의에서 자주 쓰일 전망이다. 선뜻 암호처럼 보이는 이 영문 알파벳은 삼성전자의 주요 임원을 나타내는 영문 이니셜로 순서대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한종희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부회장),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부회장),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장(사장)을 뜻한다.

삼성전자는 앞서 2016년 직원간 수평적 호칭을 골자로 하는 인사제도 개편안을 발표하고 직함 대신 ‘님’, ‘프로’ 또는 영어 이름을 자율적으로 사용해왔다.
다만 당시 팀장과 그룹장, 임원 등은 직책으로 불렀는데 이번 방침으로 경영진과 임원에게도 직책과 직급을 이용한 호칭은 삼성 내에서 사라지게 됐다.

'님' 원조는 CJ...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대기업 중에선 CJ그룹이 가장 먼저 호칭·직급 파괴를 시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CJ는 서로를 '님'이라고 불렀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재현님'이라고 불렸다는 얘기는 재계의 유명한 일화다. CJ그룹은 호칭 파괴에서 더 나아가 2021년 임원 직급을 통합하는 파격 실험을 단행했다. 상무대우부터 사장까지 6단계로 나눈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 단일 직급으로 통합했다. 재계에서는 성과 중심의 조직 개편을 통해 능력 있는 젊은 인재를 적극 발탁하겠다는 이재현 회장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보수적인 문화로 정평이난 금융권에도 직급 파괴 바람이 분 바 있다. 신한금융지주는 2021년 직위 체계를 팀장-팀원으로 간소화하고, 호칭은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 자유롭게 선정하기로 했다. 전임 조용병 회장은 자신의 호칭을 '엉클 조'로 정했다.

관가에서도 수평 호칭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인천지방국세청은 지난달 구성원 간 호칭을 직급과 직위 대신 '○○님'으로 통일해 수평적 조직문화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주원 인천국세청장은 회의에서 "'○○님' 호칭으로 연령과 직급이 다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길 바란다"며 "막힘없는 소통으로 효율적인 변화를 만들어 가자"고 강조한 바 있다.

한화에도 김동관發 호칭 통합바람

한화그룹은 2012년 직원 간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지만 2015년 기존 직급 체계로 복귀했다.

업무 책임이 불명확해지고 다른 회사와 업무를 할 때도 호칭에 따른 혼선이 적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직적 문화가 강하다'는 평을 받는 한화도 지난해 대세에 동참했다. 한화그룹 주력 계열사인 한화솔루션은 지난해 3월 직원 호칭을 기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에서 '프로'로 통합했다.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평적 의사결정, 기업의 생사 결정"

전문가들은 대기업의 잇따른 직급·호칭 파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일 이라고 평가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우리 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워일 때는 수직적인 의사결정이 선도자와의 기술 격차 등을 줄이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이제는 시장을 선도하는 국내 기업들이 많아질수록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창의성이 중요해지면서 수평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곧 기업의 생사를 결정짓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는 "현재 MZ(밀레니얼+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지적 균일화가 이뤄졌다"면서 "MZ세대 구성원들에게는 소위 수직적 문화로 일컬어지는 '도장찍기식 문화'가 통화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영진이 이 같은 특성을 알고 이들 인재가 곧 조직의 미래와 성과를 결정 짓는다는 것을 인지해 최근의 파격적 실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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