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병을 앓은 지 30년 만에 OO환을 먹으니 비로소 나았다
2023.02.25 06:00
수정 : 2023.02.25 06:00기사원문
옛날에 허숙미(許叔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집안이 무척 가난했다.
그는 한때 관직에 뜻을 두어 관직시험에 응시했으나 안타깝게도 최종 시험에서 탈락을 했다.
그래서 낙담하면서 귀향길에 올랐는데, 귀향하는 도중 어느 날 꿈속에서 흰옷을 입은 노인이 “너는 의원이 되어 부모의 한을 풀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희한한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노인의 말이 너무 생생하게 맴돌았다. 그는 결국 의원이 되었고, 제대로 된 탕약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병사한 부모님과 자신의 한을 풀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의원이 된 그는 부귀와 귀천을 막론하고 성심껏 치료를 했기에 환자들에게는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목숨을 구한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었다.
그런데 허숙미에게도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앓고 있던 고질병이 하나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했지만 글 읽기를 좋아했고, 가지지 못한 책은 빌려서 직접 필사본을 만드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겨울에도 차디찬 방에서 밤마다 호롱불 아래에서 글을 읽고 필사를 했다.
자시(子時)가 넘어갈 때면 언제나 어머니가 안방문을 열고 “애야. 이제 그만 자거라. 그러니 항상 배가 아픈 것이 아니겠느냐?”하면서 걱정이었다.
사실 몸이 피곤해서 미리 자고 싶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걱정해서 일어났을 때, 자신의 방의 호롱불이 꺼져 있으면 서운해하실까 봐 일부러 버티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글을 읽거나 필사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 때면 이상하게 몸이 왼쪽으로 기울여져 책상에 기대어 잠이 들고는 했다. 심지어는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왼쪽 옆구리가 아파서 손을 가져다 대는 통에 밥상을 엎지르기도 했다. 간혹 왼쪽 옆구리 쪽은 아프기도 하고, 덩어리가 잡히는 것 같기도 했다. 배는 아픈 듯하지만 아프지 않고 고픈 듯하지만 고프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도 어려운 조잡증(嘈雜症)이었다.
부모 모두 병사한 후 성년이 되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 술이 왼쪽에서부터 아래로 ‘꾸르륵 꾸르륵~’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소리는 술이 내려가는 소리가 아니라 장명(腸鳴)이었다. 빈속에 술이 들어오니 장이 요동치는 소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술을 반잔 만 마셔도 장의 불편함이 멎었다. 그래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증상이 지속되다가 보름에서 달포 정도 되면 꼭 구토를 했다. 그 양도 신물 몇 되는 토하는 것을 보면 위장에 있는 모든 액(液)은 다 나오는 했다. 이상하게도 여름철이 되어 땀이 나는데, 오른쪽 반신에서는 땀이 났지만 왼쪽 반신에서는 땀이 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병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고 생각해서 몇 해 동안 필사를 했던 책을 내다 팔아 병을 치료하고자 했다. 그래서 여러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아 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진찰에 나선 의원들이 “이것은 식상증(食傷症)이요!” 혹은 “식적(食積)이요!”, “과로상(過勞傷)이요.”라고 하면서 처방을 해 주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는 “이것은 어렵게 구한 해상방(海上方)이요!”하면서 권하기도 했다.
해상방이란 옛날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일종의 선방(仙方)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해상방이란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천웅이나 부자와 같은 대독(大毒)하면서 대열(大熱)한 보양제(補陽劑)나 견우자와 감수와 같은 강력하게 이뇨를 시키면서 물을 몰아내는 축수제(逐水劑)를 써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약을 복용해도 한달 정도 지나면 다시 재발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은 흘렀다.
관직시험에서 낙방한 허숙미는 결국 의원이 되었다. 그가 의원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어찌 보면 부모의 한도 있지만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의학공부에만 매진했고 결국 의술에 도통한 의원이란 소리도 들었다.
그는 어느 정도 의안(醫眼)이 생긴 이후에야 자신의 병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의원은 스스로를 진찰하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어찌하겠는가? 이제 자신의 몸을 고쳐줄 사람은 자신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항상 장에서 “꾸룩~ 꾸룩~” 하고 장명(腸鳴)이 들리는 것을 물주머니가 절구 속에 고인 물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흐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장명은 장이 늘어나서 쳐진 물풍선에 생긴 공간에 물이 차서 출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5~7일마다 한번씩 토하는 증상은 원래 맑은 것은 운행이 저절로 되지만 탁한 것은 운행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토해내는 것으로 여겼다. 몸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행하는 일종의 자가치료인 셈이다.
허숙미는 의서들을 살펴 보았다. 자신의 병증은 바로 벽음(癖飮)에 가장 가까웠다. 의서에 보면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 옆구리 아래에 물이 정체되어 흩어지지 못한데다가 찬기운을 접촉함으로써 아픈 것을 음벽(飮癖)이라고 한다. 증상은 옆구리 아래가 악기의 줄처럼 팽팽하게 땅기고 때때로 물소리가 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벽음은 요즘의 기능성 위장장애, 위하수증과 장무력증에 속한 병증이다. 더불어 수액대사의 문제였다.
허숙미는 어찌 처방을 할지 고민했다. ‘나의 병증은 비위(脾胃)가 약하고 이로 인해 습사(濕邪)가 쌓이는 것이 문제다. 비(脾)는 습한 장기로 문제가 되면 습(濕)이 쌓여서 물이 된다. 이 물을 흐르게 하거나 말리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위(胃)는 조(燥)한 장기이기 때문에 위를 돌보는 약재를 얻는다면 위(胃)에도 좋고 동시에 비(脾)의 습(濕)을 말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재들을 깊숙이 있는 것들까지 모조리 살펴보았다. 그때 창출(蒼朮)이 눈에 들어왔다. 창출은 삽주의 뿌리다. 그는 창출을 손에 들고 기뻐하며 ‘이 창출이 나의 고질적인 위장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 것이다’하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참고로 창출과 비슷한 약재로 백출(白朮)이 있는데, 백출은 주로 비(脾)를 보하고, 창출은 주로 습을 제거하는 효능의 차이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두가지 모두 삽주의 뿌리로 효능은 대동소이하다.
그는 창출로 환을 만들어 복용하고자 했다. 먼저 창출 1근을 가루를 냈다. 그리고 생마유(生麻油, 생참기름) 반 양을 얻었는데, 생참깨를 물과 함께 섞은 후 갈아서 걸러 낸 후 위에 뜬 기름만을 취했다. 그리고 대추 50개를 물에 삶아서 껍질과 씨를 제거한 후에 으깬 다음, 창출가루와 생마유를 넣어서 반죽해서 벽오동(碧梧桐) 씨 만한 크기로 환을 만들었다.
허숙미는 이 환약을 날마다 따뜻한 물로 50환을 복용했다. 환약을 먹는데, 조금씩 적응이 되고 편해지면 조금씩 양을 늘렸다. 창출환을 복용하면서 어느 날 몸이 약간 마르고 건조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치자(梔子) 달인 물에 창출환을 먹자 조열감이 없어지고 몸의 마르는 느낌도 사라졌다.
복숭아, 자두, 참새고기 등은 먹지 않았다. 의서에 보면 창출이나 백출을 복용할 때는 복숭아, 자두, 참새고기, 조개, 고수, 마늘, 청어, 젓갈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창출환을 복용한 지 3개월 정도 되자 장의 불편함도 없어졌고 구토도 사라졌다. 항상 구겨져 있는 것 같은 명치부위 가슴은 시원해 졌으며 음식을 먹을 때 맛도 좋아지고 소화도 잘됐다. 희한하게 왼쪽 반신에서 땀이 나지 않던 것도 좋아져서 여름이 되면 온 몸에 골고루 땀이 났다. 심지어 밤에 호롱불 아래에서 글을 읽는데 작은 글씨도 더 잘 보이는 듯했다. 허숙미는 창출로 30년이나 된 자신의 병을 완치시켰다.
허숙미는 만년에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유증보제본사방(類證普濟本事方)>을 저술하면서 위에서 경험한 자신의 병을 치료한 치험례를 기록해서 후학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유증보제본사방>은 요즘 <허숙미본사방(許叔微本事方)>으로 불린다.
창출은 예부터 신령스러운 약재로 여겼는데, 과거 민간에서 창출이 악기(惡氣)와 음기(陰氣)를 몰아낸다고 해서 창출을 태워서 연기를 훈증하면 귀신이 물러난다고도 믿었다. 현재도 민간에서 위장병을 치료할 때 가정요법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약방에서는 유명한 위장병 치료제인 평위산(平胃散)에 들어가 군약(君藥)으로 처방되고 있다.
*제목의 ○○은 창출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본초강목> 許叔微本事方云, 微患飮癖三十年. 始因少年夜坐寫文, 左向伏几, 是以飮食多墜左邊. 中夜必飮酒數盃, 又向左臥. 壯時不覺, 三五年後, 覺酒止從左下有聲, 脅痛食減嘈雜, 飮酒半盃卽止. 十數日, 必嘔酸水數升. 暑月止右邊有汗, 左邊絶無. 遍訪名醫及海上方, 間或中病, 止得月餘復作. 其補如天雄, 附子, 礜石輩, 利如牽牛, 甘遂, 大戟, 備嘗之矣. 自揣必有癖囊, 如水之有科臼, 不盈科不行. 但淸者可行, 而濁者停滯, 無路以決之, 故積至五七日必嘔而去. 脾土惡濕, 而水則流濕, 莫若燥脾以去濕, 崇土以塡科臼. 乃悉屏諸藥, 只以蒼朮一斤去皮切片爲末, 油麻半兩水二錢硏濾汁, 大棗五十枚煮去皮核, 搗和丸梧子大. 每日空腹溫服五十丸, 增至一二百丸. 忌桃, 李, 雀肉. 服三月而疾除. 自此常服, 不嘔不痛, 胸膈寬利, 飮啖如故, 暑月汗亦周身, 燈下能書細字, 皆朮之力也. 初服時必覺微燥, 以山梔子末, 沸湯點服解之, 久服亦自不燥矣.
(허숙미의 본사방에서는 “내가 음벽을 앓은 지 30년 만에 비로소 원인을 알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에 밤에 앉아서 글을 쓰고 왼쪽을 향하여 작은 탁자위에 기대어 엎드리고는 했는데, 이 때문에 음식은 대부분 왼쪽으로 떨어졌다. 밤중에는 반드시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왼쪽을 향해 누웠다. 장성할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3~5년 뒤에 술이 왼쪽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옆구리가 아프면서 음식이 줄어들었고 조잡증이 생겼는데, 술 반 잔을 마시면 곧 멎었다. 십수 일이 지나면 반드시 신물 몇 되를 토하였다. 여름철에는 오른쪽에 땀이 났고 왼쪽에서는 절대 나지 않았다. 명의가 두루 방문하고 해상방을 보아 간혹 병을 치료하였지만 1개월 정도 지나면 다시 발작하였다. 천웅, 부자, 반석 따위로 보해 주거나 견우, 감수, 대극 등의 소통시키는 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 벽낭이 절구 속에 고인 물처럼 자리잡고 있으나 가득 차지 않아 운행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다만 맑은 것은 운행할 수 있고 탁한 것은 정체되어 터 줄 방법이 없으므로 쌓인 지 5~7일이 되면 반드시 구토해 낸다. 비토의 나쁜 습이 수가 되면 습을 흐르게 하지만 비를 말려 습을 제거하거나 토를 높여 절구에 채우는 것만 못하다. 이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약을 다 살펴보았는데, 창출 1근. 껍질을 제거하고 얇게 잘라낸 가루, 생마유 반 냥, 물 2잔을 넣고 갈아 걸러 낸 즙, 대추 50개, 물에 삶아 껍질과 씨를 제거한 것을 함께 찧어 벽오동씨만 한 환약을 만든다. 이것을 매일 빈속에 따뜻한 물로 50환을 복용하는데, 점차 100~200환으로 양을 늘린다. 복숭아, 오얏, 참새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 복용한 지 3개월이 되자 병이 제거되었다. 이때부터 늘 복용하자 토하지도 아프지도 않았고 흉격이 시원해졌으며 음식을 평소와 같이 먹었고, 여름철에도 온몸에 땀이 났으며 등불 아래에서 작은 글자를 읽을 수 있었는데 모두 창출의 효력이다. 처음 복용할 때는 반드시 약하게 마르는 것을 느끼는데, 산치자 가루를 끓인 물에 타서 복용하면 풀리고 오랫동안 복용해도 저절로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동의보감> 蒼朮. 性溫, 味苦辛, 無毒. 治上中下濕疾. 寬中發汗, 破窠囊痰飮, 痃癖氣塊, 山嵐瘴氣. 治風寒濕痺, 療霍亂吐瀉不止, 除水腫脹滿. 皮色褐, 氣味辛烈. 須米泔浸一宿, 再換泔浸一日, 去上麄皮, 炒黃色用. 入足陽明, 太陰經, 能健胃安脾. 蒼朮, 雄壯上行之藥, 能除濕安脾.(창출.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고 매우며 독이 없다. 상중하의 습으로 인한 병을 치료한다. 속을 편안하게 하고 땀을 내며, 담음이 뭉친 것과 현벽, 기괴, 산람장기를 깨뜨린다. 풍한습비와 곽란으로 토하고 설사하는 것이 멎지 않는 것을 치료하고, 수종과 창만을 없앤다. 껍질은 갈색이고, 기미는 맵고 강하다. 반드시 쌀뜨물에 하룻밤 담갔다가 물을 바꾸어 하루 더 담근 후, 거친 껍질을 벗기고 누렇게 볶아 써야 한다. 족양명경과 족태음경으로 들어가 위를 튼튼하게 하고 비를 편안하게 한다. 창출은 기운이 웅장하고 위로 올라가는 약으로 습을 없애고 비를 편안하게 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