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한 손녀와 모국 여행을 떠난 할머니… 진정한 '노인의 포용력'

      2023.03.31 04:00   수정 : 2023.03.31 04:00기사원문
인간장수의 궁극 목표는 부부의 해로동혈(偕老同穴)이다. 하지만 백세를 함께한 부부를 찾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십여 년 면담을 해 온 수백 명의 백세인 중에서 오직 3쌍의 백세부부를 만날 수 있어 그나마 행운이었다.

부부가 함께 백살되는 비율이 아무리 낮아도 불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미국 자료에서도 백세부부는 600만쌍 중 하나의 비율일 만큼 희귀하다.


하지만 백세인의 남녀비율이 1:1인 특별한 지역이 알려졌다. 사르데냐 오롤리의 백세인들은 대부분 부부였다. 이 곳의 어느 백세부부의 장수비결이 특별하였다. 남편 피라스는 101세였는데 평생 목동으로 매일 양떼를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답한 반면, 100세 부인 실비아는 조용하게 "가정의 평화라네"라고 하였다. 장수비결이 가정의 평화라는 말은 평생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말이었다.

최근 전통적 가족관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혼풍속이 크게 변하고 있다. 혼인연령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격감하고 혼인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이혼 비율이 급증하고 심지어 황혼이혼마저 증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가족의 결속력이 약해져 가고 가족제도의 복합성이 증가되면서 전통적 측면에서의 가족과 가정이라는 개념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 부부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가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하여서 가족의 핵심연계고리인 어르신의 역할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장수시대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참고할만한 미국인 가족의 사례가 있어 인용해본다.


지난 2007년 봄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필자가 1964년에 보이스카웃 대표로 미국잼버리에 가던 중 민박한 네브라스카 오마하에서 걸려 온 놀라운 전화였다. 동년배 미국 보이스카웃인 마이크 암스트롱의 집으로 배정되어 일주일이상을 머물렀고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당기간 인연을 이어갔다. 그 가족과는 1989년에 와싱톤DC 다녀 오는 길에 들러 재상봉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에피소드도 새롭다.

공항 도착 전에 전화를 걸어 25년이나 지나 고교시절과 달라진 모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입은 옷과 들고 가는 가방을 설명하자 어머니 폴린은 "아무리 변해도 알아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 하면서 웃었다. 오마하에서 3박4일을 머무는 동안 전에 다녔던 장소도 가보고 만났던 사람들과도 반갑게 어울릴 수 있었다. 마치 사반세기가 동면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후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였는데 어머니 폴린의 전화가 걸려와 깜짝 놀랐다.

여름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니 만나자고 하였다. 무조건 환영하면서 우리나라에 오면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물었다. 뜻밖에도 광주와 경북 문경을 방문하고 싶으니 일정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광주는 그렇다 하더라도 문경은 왜냐고 물으니 웃으면서 나중에 이야기하마고 하여 궁금하기 만하였다. 공항으로 출영해보니 폴린은 새 남편 하인즈와 딸 로빈 그리고 손녀 케시를 동행하고 왔다. 가족상황변화를 들어 보니 본 남편 제리와 10년전 사별하고 7년전 지금 남편 하인즈와 재혼하였다. 딸 로빈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서 외로울 거라고 딸을 홀트재단을 통하여 한국에서 입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입양아를 선택한 기준이 뜻밖이었다. 문경의 어느 병원에서 산모가 팔삭둥이를 낳고 사라져 맡겨진 아이를 택하였다. 아이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바로 비행기를 탈수 없어서 일년 동안 유모를 들여 키워가지고 데려갔다. 이왕이면 잘생기고 건강한 아이를 택하였을 터인데 오히려 문제가 있는 아이를 선택하였다는 점이 놀라왔다. 그래서 물었더니 자신들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아이를 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며 심상하게 반문하여 가슴이 멍해졌다. 그 입양한 아이가 바로 케시였다. 한국을 방문한 이유를 듣고 더욱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녀 케시가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 그녀에게 모국이 한국이라는 정체감을 심어주고 출생지를 방문하여 가능하면 친부모가족을 만나게 해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비록 케시의 친부모를 만나지 못하였지만 광주와 문경을 거쳐 서울을 구경하고 떠났다. 케시도 자랑스럽게 발전한 모국을 보면서 쁘듯함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이들 부부가 손자녀들과 함께하는 여행 목적을 듣고 나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부부는 손자 손녀들이 장성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일주일 정도 함께 해외를 여행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케시 차례가 되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한국을 온 것이었다.

폴린은 원남편인 제리와 낳은 2남1녀와 재혼한 하인즈가 데려온 1남3녀를 모두 똑 같은 자식으로 대하였으며 자신의 자식이 3남4녀로 늘었다고 웃으면서 자랑하였다. 이들 자식들 중에는 이혼하고 재혼하기도 하여 이들과 관련 지어 맺어진 손자녀가 24명이나 되었고 증손자녀도 13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손자녀를 자신의 직계혈통이던지 아니던지 간에 상관없이 똑같이 대하였고 각자가 고교 졸업할 때면 반드시 일주일씩 해외여행을 다닌다고 하였다. 복잡한 구성을 가진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하여 이들 부부가 진지하게 지극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옷깃을 여밀 수 밖에 없었다.

우리사회는 혈연중심 부계사회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으나 다른 문화권에는 모계사회도 있다. 단일혈연 위주가계와는 달리 세상에는 부모가 다르거나 여럿일 수도 있으며 입양도 인정되는 복합혈통가계도 있다. 인류사적으로 어느 방식만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으며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수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결혼풍속 변화와 가족관계 복잡성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나가고 있다.


수명연장 장수시대는 가족 다양성을 더욱 심화하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가정을 수용하듯이 이제는 다부모가정도 받아 들여야 할 필요가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격변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르신들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중심을 잡고 포용하고 이끌어가야 할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다.
사르데냐의 백세인이 언급한 가정의 평화가 장수비결이라는 언급을 되새기며 나이듦이 거룩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본다.

박상철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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