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巨商과 인연, 대구 서문시장 100년

      2023.04.09 13:32   수정 : 2023.04.09 13:33기사원문
【대구=김장욱 기자】지난 7일 오후 평일에도 불구하고 대구시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한국관광의별·한국관광 100선)은 손님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점심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분식골목과 보리밥골목, 칼국수골목 등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전국 3대 시장인 서문시장은 지금의 자리로 둥지를 옮긴 지 100년이 됐다.

이에 발맞춰 대구시와 중구청, 서문시장연합회 등은 지난 1일 큰장로 일원에서 '2023년 서문시장 100주년 대축제'를 개최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는 윤석열 대통령 내외가 참석해 더욱 의미를 더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대구시민의 땀과 눈물이 담긴 역사의 현장인 서문시장에 이러한 우리의 헌법정신이 그대로 살아있다"면서 "서문시장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는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근·현대 대구의 역사와 삶을 고스란히 품어
조선 초기 서문시장은 대구읍성 북문 밖에 자리 잡은 조그만 향시(鄕市)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에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대구는 영남의 정치, 경제, 국방의 거점으로 도약을 거듭했다.

17세기 대동법의 실시로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임란 후 조정은 기존의 조세를 지방 특산물(공물) 대신 쌀이나 면포로 내게 했다.

또 조운선(漕運船), 보부상들이 등장하고 유통, 물류가 발달하며 대구는 일약 영남 경제의 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상권의 신장을 배경으로 조선 후기엔 "서문시장에 가면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시(場市)가 흥했고 마침내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도약하며 조선 유통, 상업, 물류의 중심이 됐다.

대구의 시장은 대구장 또는 읍장이라 불렸고, 뒤에 서문 밖 시장 또는 서문시장이라 부르게 됐다. 시장의 규모와 거래액이 크기에 '큰장' 또는 '대구 큰장'으로도 불렸다.

이외 맏형격인 서문시장을 비롯해 화원장, 현내장, 무태장, 백안장, 범어장, 오동원장, 풍각장, 해안장 등 여덟 곳의 장시가 더 있어 대구는 전주, 평양과 더불어 3대 향시의 하나로 꼽혔다.

특히 서문시장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역사적 현장이다. 지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할 조직인 금연상채회는 서문시장 한가운데인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해 의연금 모금을 이끌어 냈다.

또 전 민족적 항쟁인 3·1운동이 경상도 최초로 폭발한 곳 역시 서문시장이다. 1919년 3월 8일 당시 대구의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은 서문시장 한복판에 쌀가마니를 쌓아 만든 임시 강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운동 연설을 거행했다.

서문시장은 1923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23년 4월 대구부는 '시구 개정사업'에 따라 약 39만원의 예산으로 천황당 못을 메우고, 그 주변을 정비해 새롭게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

서문시장은 전체 면적 1만5021㎡(4544평)에 5구로 나눠 조성됐다. 지구 사이에는 가로·세로 8.1m, 내지 10.8m의 통행로가 만들어지고, 통행로 양측에 하수구가 설치됐다. 1640㎡(496평) 규모의 건물도 갖췄는데 잡화점이 3동, 어물전과 곡물상이 각 2동, 창고 1동으로 구성됐다.



■화재 17회 발생, 2005·2016년 큰 피해
서문시장은 100년 역사 동안 여러 차례 크고 작은 화재와 싸워야 했다. 기록된 화재만 무려 17회다. 1952년 2월 24일 점포 4200개가 전소된 대 화재를 시작으로 1960년, 1967년, 1975년에도 큰 화재가 발생했다.

2005년 12월 2지구 상가에서 발생한 화재로 186억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났다. 10여 년 뒤인 2016년 4지구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점포 839곳이 전소되고 460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서문시장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큰 화재로 기록됐다. 다행히 사고가 난 지 6년 만에 4지구를 새로 지을 시공사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과거보다 저조한 매출, 낡고 노후화한 시설, 코로나19 팬데믹 등 악재가 겹쳤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2월 개장 이래 처음으로 서문시장 전체가 엿새간 문을 닫기도 했다.

■정치적 상징성·삼성상회 이병철 등 부자 발상지
서문시장은 경제적인 부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징성을 키우고 있다. 대구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1순위로 서문시장을 찾는다.

서문시장이 정치인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건 1997년 치러진 제15대 대선부터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 전 총재가 서민적 이미지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서문시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치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서문시장을 찾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 대한 역풍이 불자 세 결집을 위해 서문시장에 방문했고, 2012년 대선 과정에서도 찾았다.

대통령 당선 후에도 서문시장을 찾았던 그의 마지막 방문은 4지구 대형화재가 발생한 2016년이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탄핵이라는 정치적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지지율 정체를 대구 방문으로 돌파하곤 했는데 그 중심지는 역시 서문시장이다.

윤 대통령 내외는 취임 후 이날까지 모두 세번째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찾았으며, 김 여사는 지난해 1월 혼자 방문한 적이 있다.

서문시장은 부자 신화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1938년 서문시장에 삼성상회를 차리고 무역업에 뛰어든 이병철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 정도로 익숙하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이 가장 대표적이다. 김광제와 더불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은 보부상 출신으로 거부가 된 인물이다.

금융자본가로 이름을 날린 정재학은 낙동강수운을 이용해 쌀과 소금장사를 했다. 소금값이 급등해 정재학은 금세 대구의 대부호 반열에 올랐다가 이일우, 장길상, 최준 등과 함께 민족은행의 기치를 내걸고 1913년 대구은행을 설립하고 대주주로서 은행장에 취임했다. 그는 1940년까지 대구은행을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尹 대통령에 △구국운동기념관 △지하주차장 국책사업 요청
대구시는 서문시장을 찾은 윤 대통령에게 인근 계성중학교 운동장에 국립구국운동기념관을 짓고, 지하에 대규모 주차장을 건설해 서문시장 주차난까지 해소하는 국책 사업(총 사업비 2500억원 규모)을 제안했다.

'구국운동기념관'은 대구 3·1만세 운동길, 근대 서양식 주택인 동산선교사 주택 , 청라언덕 등 서문시장 인근 역사문화자원을 연계해 구국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상징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시 관계자는 "3·8만세운동 당시 대구에서 쓸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던 장소가 계성학교 아담스관이며, 1923년 대구 물산장려운동의 중심이었고, 6·25 전쟁 낙동강 전투 당시 전선에 보낼 물자를 조달한 곳도 바로 서문시장이다"면서 "정부 차원에서 이런 역사를 보존하고 기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사업을 제안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접근성, 역사성 등을 고려했을 때 구국운동기념관 설립 최적지는 현재 계성중학교 운동장 일대다.
이곳에 지하 3층의 대규모 지하주차장까지 함께 조성되면 서문시장 내 주차난도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보고한 사업비 750억원 규모의 '백년시장 육성 프로젝트'에 대해 윤 대통령이 '적극 추진'을 주문해 서문시장 시설 현대화 사업에 대한 국비 지원도 일정 부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서문시장은 지역민의 애정이 깊은 특별한 장소로, 앞으로의 100년을 위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역할이다"면서 "정부 역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gimju@fnnews.com 김장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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