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통화 녹음
2023.04.19 18:17
수정 : 2023.04.19 18:17기사원문
지난해 8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기사에 달린 댓글 중 '극히' 일부이다. 부적절한 표현도 일부러 그대로 인용했다.
윤 의원은 "당사자 간의 대화를 녹음해 협박 등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면서 이는 "대화자 일방의 사생활의 자유 또는 통신 비밀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제안 이유로 들었다. 조지프 터로 교수의 책 '보이스 캐처'를 인용, "음성인식 기술은 목소리 톤으로 감정이나 성격을 추론하고, 나아가 그 사람이 앓는 질병부터 나이, 인종, 교육 및 소득까지 유추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비밀녹음은 미래에 '생체정보 유출 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도 했다.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지만 실제 속내는 달라 보인다. 녹음 내용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된 여러 사건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다. 윤 의원 자신이 2016년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비난하는 통화 녹취가 공개돼 파문이 일자 탈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 전력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대선 예비후보이던 원희룡 전 지사와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한 일이나, 권성동 원내대표와 윤석열 대통령의 "내부 총질 당 대표" 문자 노출 사건 등으로 "우리 정치가 유치찬란해진다"는 이유를 들어 개정안을 지지한 사람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의 녹취파일 쓰나미가 몰려오는 중이다. 2021년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뿌려진 증거가 연일 공개되면서 민주당은 수사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형님, 우리도 주세요." "오빠, 하려면 다 해야지." 전가의 보도인 '야당 탄압' 주장은 녹취록을 통해 들리는 생생한 목소리 앞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묵묵부답이 장기인 이재명 대표가 공개 사과한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웅변한다. 그러고 보니 반대 여론을 접한 윤 의원이 법안을 철회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대로 추진했다면 여야 할 것 없이 호응을 얻어 입법화될 게 분명한 법이었다. 녹음 증거가 아니었으면 민주당은 여전히 '조작 수사'를 외칠 것이다. '유치찬란' 정도가 아니라 썩어 빠진 정치권의 실상을 드러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게 뻔하다. 이 전 부총장의 녹취파일은 3만여개, 범죄 혐의가 있는 것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토록 녹음에 집착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만큼 정치권의 검은 속을 정치인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이쯤 되면 정치인들의 통화 녹음은 금지가 아니라 오히려 장려할 일이 아닌가 싶다.
dinoh7869@fnnews.com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