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발에 오줌 눠도 동상은 그대로다
2023.05.15 18:25
수정 : 2023.05.15 18:44기사원문
남들이 구린 돈을 벌어들이거나 뿌리는 것도 열받게 하지만, 자기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에는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이런 와중에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드디어 결정됐다.
발표된 이 소식을 기꺼워할 국민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장부상 숫자만 놓고 보면 인상 폭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한전의 상황을 확실히 호전시키는 데 필요한 인상금액의 절반에 그쳐서다.
한국전력은 작년에 30조원 넘는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 들어 1·4분기까지 적자를 합치면 38조원에 달한다. 지금도 하루 30억원씩 이자를 물고 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다. 지난 몇 달간 온 국민이 한전이나 가스공사의 재무구조를 '강제로' 공부해서다.
한국에서 워낙 멀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21세기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전력난' 때문에 100년 전에나 있었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다.
공항이나 병원 같은 중요시설에도 단전이 일상이고, 전기가 안 들어오니 길가에 신호등이 있으나 마나 한 상황이다. 전기를 물이나 공기처럼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전의 상황과 똑같이 비교하긴 어렵지만, 남아공 전력난의 원인인 국가 기간발전 공기업의 오래된 적자와 시설 노후가 원인이다. 전기요금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반대쪽에서는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우선이라는 지적들이 쏟아진다. 문제는 공기업들의 뼈만 깎아내다 한쪽 팔과 다리라도 날아가면 한국에서도 남아공 같은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발표된 인상 폭은 2·4분기 요금에 대한 것이다. 3·4분기는 전력수요가 폭증하는 여름, 4·4분기는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이다. 사실상 2·4분기 요금인상으로 올해 더 이상 올리기 어렵지 않겠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다.
전기요금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지난 정부와 정치권이 오랫동안 국민의 눈치를 보며 제때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인상안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
지금 정부는 달라져야 한다. 정치적 셈법이나 여론의 질타가 두려워 추가 인상을 주저한다면 전력위기는 연말이든 내년 초든 언제든 다시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다.
전기나 가스 요금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공식으로 결정되는 비용이다. 이를 '정치요금'으로 둔갑시키면 몇 배 비싸진 그 값은 결국 국민이 물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경제부장
ahnman@fnnews.com 안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