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뜻대로 오롯이 봉사에 헌신… 105세 의사가 삶으로 증명한 '치유'
2023.06.30 04:00
수정 : 2023.06.30 14:27기사원문
1960~70년대에 걸친 대학생활은 학생데모와 휴교령으로 점철된 격동의 기간이었다. 나의 막역한 친구도 당시 상과대학 학생으로 운동권에 참여했는데 갑자기 각혈하는 위중한 결핵에 걸려 휴학하게 됐다. 그후 목포시 변두리에 있는 한산촌이라는 결핵요양원에 입주했다는 전갈이 왔다.
그런데 같은 대학에 다니던 친구의 여친이 매주 토요일 야간열차로 내려가 면회하고 일요일 야간열차로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반성하고 한산촌을 찾아갔다. 12시간이 넘는 열차 시간, 역에서 내려 버스 타고 다시 걸어서 한 시간 넘게 걸려 찾아간 야산 중턱에 조립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한산촌을 건립한 분은 여성숙 원장이었다. 잠깐 스치듯 만난 여 원장은 중년의 여의사로 포근하면서도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친구는 완쾌해 성공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됐고 그때 그 여친과 결혼해 아름답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친구와 잡담하다가 무심코 여성숙 원장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 건강하게 생존해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918년생이니까 105세가 된 분이다. 이 연세라면 우리나라 생존 의사 중 최고령으로 추정돼 백세인 연구 대상으로서도 관심이 갔지만,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들을 위해 살아온 특별한 분이기에 만나보고 싶었다. 마침 한산촌 환우로 퇴원해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사람들의 모임이 있는데 지금도 매년 한 번씩 찾아 인사한다고 해 동행했다. 모임의 멤버들은 연령도 다양할뿐 아니라 직업도 국회의원, 의사, 교수, 회계사, 기업가, 영농가 등 다양했다.
여러 곳에서 온 멤버들이 광주송정역에 모여 목포로 함께 향했다. 한산촌은 이제 결핵요양원이 아니고 기독교의 디아코니아(Diakonia)자매회가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으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결핵 요양시설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 노인들을 위한 시설로 변모된 모습에 세월의 흐름과 사회 발전을 엿볼 수 있었다. 여 원장은 휠체어에 앉아서 찾아온 멤버들을 모두 알아보고 일일이 껴안아 주었다. 그 속에 끼어 참석한 나를 보더니 "이 사람 나 몰라"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소개를 하였다. 50년만에 만난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선 찾아온 멤버들을 거실에 둘러앉게 하고 돌아가며 노래를 시켰다. 칠십이 넘은 옛 환우들은 백살이 넘은 여 원장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분이 좋아했던 노래인 '보리밭', '오빠생각', '아 목동아' 그리고 찬송가를 차례로 열창했다.
여 원장의 집안은 대대로 장수했다. 모친도 102세까지 살았고, 남동생도 98세까지 살았다. 여 원장은 찾아온 멤버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자네들은 모두 훌륭한 인재들이야" 라며 칭찬해주었다. 자신이 병을 치유해줘 사회의 지도자가 돼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대견하게 여겼다. 그런데 한 멤버가 "원장님이 칭찬해주시는 것 처음 보네"라며 감격해 했다. 입원했던 시절 항상 마음을 단단히 가질 것을 독려하면서 야단쳤던 추억을 되새기게 한 것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갈래?" "언제 또 올래?" "또 와!" 하면서 헤어짐의 아쉬움을 진하게 토로하셨다. 가을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떠나려 하자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현관에서 내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친구가 내게 여성숙 원장의 '꿈의 주머니를 별에다 달아매고'라는 회고록을 건네주었다. 여 원장이 최근 청각이 나빠져서 대화를 편하게 할 수 없어서 아쉬었던 참인데 소통이 어려워 묻지 못한 질문의 답을 찾아보라고 배려해준 것이다. 여 원장은 황해도에서 태어나 평양소학교, 원산 마르다윌슨신학원, 일본 교와이여학교를 나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마친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단에 의해 학업을 이어갔고 의사가 된 뒤에는 전주 예수병원, 광주 제중병원을 거쳐 목포에 의원을 개원했다가 결핵 환자들의 불쌍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1965년 결핵전문 요양시설인 한산촌을 개설했다. 한산촌이라는 이름은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삶이니 크게 바르게 한 삶을 살자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했다. 한산촌에 입원해 치료받고 간 환우는 2000명이 넘고 내원 치료 받은 환자는 5만명이 넘었다. 개인이 설립한 시설이 이토록 수많은 환자들에게 의료봉사를 할 수 있었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비도 저렴했지만 그러한 경비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는 무료로 치료하고 살림도 보살펴주었다. 헌신적인 의료봉사의 대명사인 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 원장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용기를 주었다. 여 원장은 함석헌, 안병무, 장준하, 박영숙, 김옥라 등 사회지도자들과도 많은 교감을 나누었고 격동기의 운동권 학생들을 앞장서서 보호해주었다. 특히 안병무 교수의 권장으로 기독교의 수녀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코니아자매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래서 경기도 양평군에 본격적인 센터를 지으려고 했으나 당국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한산촌으로 내려와 자신의 전 재산을 기증해 한국디아코니아본부를 설립했다.
100살이 넘게 헌신적 봉사로 일관해 살아온 분에게 혹시나 살면서 아쉽거나 미진했던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거침없이 "없어! 더 하고 싶은 일 없어! 후회없어!"라고 답했다. 자신의 뜻을 실컷 펴면서 당당하게 살아온 삶은 바로 거룩한 삶 그 자체였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묻자 단호하게 답했다. "관심없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하나님이 부르면 홀홀 가겠다는 초월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과 봉사로 헌신하면서 살아온 삶은 그 분의 사랑을 받은 모든 이에게 밝은 등불이 되었다. 여 원장은 회고록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생엔 반복이 없다. 하기에 다시 살 수도 없는 인생이니 여기서 후회는 부질없는 것이 되리라. 사랑을 알고, 사랑을 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나! 그 '나'를 살고 싶었는데…"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