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일 노래 '아파트'가 이렇게 슬플 줄이야...엄지척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08.03 06:00
수정 : 2023.08.03 15:2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지난 몇 년간 집값 폭등으로 인구의 대다수가 가만히 앉아서 가난해졌다. 집 문제로 싸우다가 남편이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어린 자녀를 남겨둔 채 자살하는 비극적 사건도 일어났다. 사상 초유의 ‘빌라왕 전세사기’ 사건은 그야말로 집 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지옥으로 내몰았다.
국토 좁은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가성비 좋은 공동 주택 양식의 하나로 그 역사가 시작됐으나 ‘한강의 기적’과 함께 재테크의 수단이 됐고, 이제는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가 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갑자기 왜 아파트 이야기를 하냐면 올 여름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단순히 오락적 재난영화가 아니라 아파트에 투영된 한국사회의 슬픈 초상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다시 또 찾아왔지만/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쓸쓸한 너의 아파트' 1982년 발표된 윤수일의 히트곡 ‘아파트’가 이렇게 슬프게 들릴 줄이야.
천만 배우 이병헌의 연기는 그야말로 ‘엄치 척’을 부르며, 재기발랄한 데뷔작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으로 업계의 눈도장을 톡톡히 찍은 엄태화 감독은 올 여름 ‘밀수’의 류승완, ‘더문’의 김용화, ‘비공식작전’의 김성훈 감독과 같은 쟁쟁한 흥행감독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명료하게 새긴다.
엄 감독은 패기 넘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뚝심 있게, 세련되게 밀어붙인다. 지난여름 신인감독 이정재의 데뷔작 '헌트'가 관객의 선택을 받았던 것처럼, 올 여름에는 충무로의 젊은 피,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 바통을 이어받길 바란다.
기존 흥행 감독들이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재능있는 신인 감독이 계속 나와줘야 한국의 영화산업이 더욱 튼튼해질 것이라는 점에서 특히나 그렇다.
긴장감 쫄깃, 블랙코미디처럼 웃겼다가 너무나 아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후 생존드라마를 그린다는 점에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시종일관 긴장을 자아내면서도 어떨 때는 블랙코미디처럼 웃기고, 동시에 지독하게 우울하다. 만약 내가 저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럽다가도 그들 각자의 사정이 십분 이해 돼 마음이 저려온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대지진, 그리고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오직 황궁 아파트만은 그대로다. 소문을 들은 외부 생존자들이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자 입주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새로 뽑힌 주민 대표 ‘영탁’(이병헌 분)을 중심으로 새로운 규칙을 만든다. 지옥 같은 바깥세상과 달리 주민들에겐 더 없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된 황궁 아파트. 하지만 생존의 위기 속 그들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한 갈등이 시작된다.
이병헌은 아파트 안에서 점점 영향력을 넓혀가는 ‘영탁’의 변화를 디테일하고 치밀한 감정선으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다소 얼치기 같아 보이던 그는 등 떠밀리듯 맡게 된 주민 대표를 하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점점 표정이 달라진다. 특히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면서 드러나는 폭력적 과거는 그 절박함이 공감돼 안타까움을 자아내며, 미워할 수 없는 광기의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장악한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대세 배우 박서준은 가족을 지키려는 보통의 가장 ‘민성’ 역을 안정적으로 연기한다. 평범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점차 변해가는 캐릭터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으려는 민성의 아내 명화 역의 박보영은, 예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희망의 상징과 같은 캐릭터로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현실적인 남편과 달리 이상적인 그의 선택은 어떨 때는 답답함을 자아내지만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광기의 질주를 멈출 수 있다.
황궁 아파트의 부녀회장 ‘금애’ 역은 다양한 작품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준 김선영이 맡았다. 김선영은 이번에도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어떻게 보면, 황금 아파트의 사람들도 평범한 우리네 이웃이다. '콘크리트 속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공동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황금아파트 주민들과 같은 미래를 맞이할 수도, 아니면 다른 미래를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