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의료사고 민사소송 입증기준 완화…"환자 증명 책임, 개연성으로 충분"
2023.09.17 10:40
수정 : 2023.09.17 10:4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의료사고를 당한 환자 측이 병원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 소송에서 환자 측은 진료상 과실을 의학적 측면에서 의심이 없을 정도가 아닌, 환자의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지금까지 의료사고와 관련한 민사 소송에서 환자 측이 의료사고 원인이 될 만한 건강상 결함이 없었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던 만큼, 이번 판례로 환자 측 입증 기준이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A씨의 유족이 한 의료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7일 밝혔다.
지난 2015년 12월 서울 강서구 소재 병원에서 어깨 수술을 받던 70대 남성 A씨가 수술중 심정지로 사망했다. A씨 유족은 2019년 7월 병원을 운영하는 의료재단을 상대로 1억6000여만원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유족들은 마취과 전문의가 환자를 소홀히 대했고 간호사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않아 A씨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수술에서 의사 B씨는 A씨에게 전신마취를 한 뒤 간호사에게 모니터링을 지시하고 수술실을 비웠다. 이후 갑자기 A씨 혈압이 내려가는 이상 소견이 발생하자 간호사는 의사에게 연락을 했고 B씨는 전화로 혈압상승제 투여를 지시했다. 뒤늦게 돌아온 B씨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고 A씨를 대형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했다.
1심과 2심은 유족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90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심은 "마취 유지 중 A씨에 대한 감시 업무를 소홀히 해 응급상황이 발생했고 간호사의 호출에 즉시 대응하지 않아 제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며 "이로 인해 망인의 사망이라는 결과 발생의 위험성이 급격히 높아졌으므로 진료 과실과 망인의 사망 사이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봤다.
대법원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은 특히 의료 사고 소송의 환자 측 법적 입증 책임도 완화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환자 측에서 '일반인의 상식'에 바탕을 둔 의료상 과실 행위 입증을 요구했다. 또 의료사고로 인한 피해가 기존 질병 등 다른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환자 측의 몫이었다.
그런데 진료상 과실로 인한 민사소송에서 의료행위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 환자 측이 의료진 과실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진료상 과실과 환자 측 발생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환자 측 뿐만 아니라 의료진 측에서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대법원 역시 지적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증명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환자 측이 통상의 의료인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 위반, 즉 진료상 과실로 평가되는 행위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과실이 환자 측 손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면 인과관계 증명 책임을 완화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다만 손해 발생의 개연성은 의학적 측면에서 완벽하게 증명될 필요는 없지만, 의학적 원리 등에 부합하지 않거나 해당 과실이 손해를 발생시킬 막연한 '가능성'이 있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에는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조건을 달았다.
또 환자가 입은 손해가 의료상 과실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의료행위를 한 의사·병원 등이 증명하면 이 같은 인과관계 추정은 깨질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의료과오 민사소송에서 진료상 과실이 증명된 경우 인과관계 추정에 관한 법리를 정비해 새롭게 제시했다"고 전했다.
한편 대법원은 마취를 담당한 전문의 형사사건은 파기환송했다. 2심은 의사의 업무상과실치사·의료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보고 금고 8개월과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의사의 진료상 과실이 피해자의 사망을 야기했는지에 대한 증명 부족을 이유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의사가 수술실에 남아 대응했다면 A씨가 사망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더 살펴보라는 취지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