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영장심사에 임하면 된다

      2023.09.20 18:27   수정 : 2023.09.20 18:27기사원문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정치권에서 유행 중이다.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상대 공격에 주로 쓰이지만 현재의 한국 정치를 묘사하는 말로 더 적합한 게 있을까 싶다.

'야당 대표의 식사 문제'가 40년을 건너뛰어 2023년 대한민국 정치의 최대 화두로 부상한 것부터 그로테스크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은 1983년 김영삼(YS) 전 대통령 단식을 소환했다.
모든 분야가 상전벽해로 바뀌는 세월 동안 정치만 거꾸로 갔음을 보여준다. '괴기'하다. 당시 YS의 동정은 언론 통제로 인해 '재야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암호 기사로밖에 알릴 수가 없었다. 야당의 정치활동을 완전히 금지한 군부독재의 얼음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빛나는 이정표로 기록될 일이다. 1990년 DJ의 단식 역시 기억할 만한 정치행위였다. 헌법 조문에만 있던 지방자치제 실시를 관철해 낸 것이다. YS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DJ는 소수파로서 극한투쟁밖에 선택할 수단이 없었다. 절대다수 의석의 원내 제1당 대표의 뜬금없는 단식은 '극도로 부자연하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과거 "21세기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라며 삭발, 단식, 의원직 사퇴를 꼽았다. 박 전 원장은 그러나 이 대표가 "단식을 선택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며 "이재명의 단식에서 김대중의 단식을 본다"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원한 DJ 비서실장'을 자처하는 박 전 원장이다. 이재명의 단식에서 김대중의 단식을 본다니. 아무리 공천이 급해도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다름 아니다. 극한의 굶주림 속에서도 이 대표는 동조단식자 명단과 방문자 명단을 잘 관리하라고 지시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공천에서 탈락시킬 이른바 '수박'들을 골라내겠다는 의도를 스스로 밝힌 것이다. 의원들은 병풍처럼 이 대표 주위를 둘러싸고, 얼굴도장 찍으려 발걸음을 재촉하고, '체포동의안 부결'을 다투어 공개적으로 인증하기 바쁘다. 그들의 초조한 행보에서 '헌법기관'의 권위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무기명 비밀투표가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마저 스스로 포기하는 행태는 괴기한 정도를 지나 안쓰럽다. 민주당은 이 대표가 병원에 간 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며 '잔인한 검찰'이라고 비난한다. 검찰이 영장청구 날짜를 맞춘 게 아니라 검찰 수사일정에 맞추어 이 대표가 단식을 시작한 게 진실이다. 9월 정기국회 개회 시 이미 21일, 25일 본회의 일정이 공지된 바 있다. 18일이나 19일 영장을 청구해야 양일 중 하루 체포동의안 표결이 가능하다는 전망은 오래전에 나온 얘기다. 이 대표를 비호하는 건 자유지만 검찰을 악마로 만드는 전략은 우스꽝스럽다.

그로테스크를 넘어 자연스러운 정치를 만드는 방법은 쉽다. 이 대표는 스스로 '불체포특권 포기'를 공언한 바 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은 검찰 수사를 정치검찰의 조작수사, 신작(창작)소설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증거를 조작하고, 증거를 하나도 내놓지 못한다고 검찰을 비난한다. 주장대로만 하면 된다. 이 대표가 영장실질심사에 임하여 법관 앞에서 검찰의 조작수사를 입증하면 된다. 당연히 영장은 기각될 것이고, 검찰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무죄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요하게 구속을 추진해온 검찰 수사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가 바라는 대로 구속만은 피할 수 있고, 검찰은 불구속 기소할 수밖에 없다. 박용진 의원의 말처럼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켜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표는 "체포안 가결은 정치검찰의 공작수사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체포동의안 부결을 외치는 모습은 정말 괴기하다.
둘 중 하나 아니겠는가. 겉으로 하는 말과 달리 속으로는 스스로도 유죄라고 확신하거나 판사마저도 '정치판사'여서 믿을 수 없다는 것. 국민들 앞에서 거짓말한 게 아니라면 법관 앞에서 못할 게 무엇인가. 법관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앞으로는 국민들 앞에서도 해서는 안 된다.

dinoh7869@fnnews.com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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