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열풍에 깨어난 유럽사회… '신' 아닌 '인간의 시대' 열다

      2023.10.20 04:00   수정 : 2023.10.25 16:24기사원문
#1. 얼마 전 금색 라벨이 인상적인 와인을 만났습니다. 라벨 속에는 중세 귀족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하인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아드는 모습이 정감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뉴요커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루피노(Ruffino)와이너리의 '리제르바 두깔레(Riserva Ducale)'입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나는 이 와인은 산지오베제(Sangiovese) 80%에 메를로(Merlot) 20%가 블렌딩 됐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에도 등장 인물들이 모일 때마다 즐기는 모습이 여러번 나옵니다.


'공작이 남은 물량 모두를 예약한 와인'이라니…. 그런데 이름이 참 재밌습니다. 얼마나 맛있길래 공작이 팔지 못하게 했을까요. 1890년 이탈리아 북서부 아오스타(Aosta) 지역의 공작이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던 중 들른 피렌체에서 루피노 와인 맛에 홀딱 반했습니다. 그는 즉시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은 와인을 모두 사가겠다"고 말합니다. 루피노 와이너리 주인은 와인저장고 문에 '공작이 예약한 와인'이라고 써놓은 게 계기가 되어 나중에 '리제르바 두깔레'라는 이름이 붙게 됐습니다.

도시국가 시절 영주가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날 때는 선발대가 미리 며칠 앞서 마을에 도착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숙소는 물론이고, 음식과 와인은 어떤 것을 올릴 것인지를 미리 파악해 준비했습니다. 아오스타 영주의 소믈리에(sommelier)는 주군에게 바칠 와인을 고르느라 아마도 며칠을 동굴속에서 지내며 끙끙댔을 겁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 어두컴컴한 동굴 속 와인저장고에서 와인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믈리에는 촛불을 들고 '따스트 뱅(Taste Vin)'이라 불리는 커다란 은수저에 와인을 따라 색과 향, 맛을 봤습니다. 은색 수저를 쓴 것은 빛이 충분치 않은 동굴속에서 와인의 색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부유물 여부도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믈리에의 목에 달린 따스트 뱅은 소믈리에를 상징하는 표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와인 맛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소믈리에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만해도 와인과 관련된 직업은 소믈리에 외에도 부떼이예(bouteiller), 에샹송(echanson) 등 아주 세분화 돼 있었습니다. 소믈리에는 우리가 많이 들어 알고 있지만 부떼이예와 에샹송은 와인을 좀 안다는 사람도 상당히 낮설어합니다. 왕궁이나 영주가 거주하는 곳에는 포도밭을 관리하는 부떼이예, 지하동굴의 와인 까브를 관리하며 그 날 식탁에 오를 와인을 골라주던 소믈리에, 식탁에서 와인 맛을 보며 와인을 서빙하는 에샹송이 있었습니다. 소믈리에의 선택을 통해 지하 동굴을 벗어난 와인은 소믈리에가 아닌 에샹송이 다뤘습니다. 중세의 경우 와인을 이용해 정적을 독살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식탁에서 와인을 다루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먼저 와인을 비롯한 식사 전반에 이상이 없는지 맛을 보고, 와인과 물을 희석하는 비율도 정했습니다. 에샹송은 이처럼 중요한 보직이어서 왕의 신임이 절대적인 귀족 출신이 맡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붕괴되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에샹송이란 직업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후 궁정이나 귀족 식문화가 호텔, 레스토랑 등에 본격적으로 스며들면서 소믈리에가 와인과 관련된 모든 역할을 대신하고 오늘날 전문직업인 와인 소믈리에로 자리 잡게 됩니다.

#2. 유럽 사회가 서기 1000년을 앞두고 완전히 패닉에 빠집니다. 서기 1000년이 되면 성경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 세상이 멸망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밀레니엄 대혼란'입니다. 그런데 막상 1000년이 됐는데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한편으론 "신이 인간에게 한 번 더 참회할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천국에 가려면 죽기전에 반드시 일생동안 저지른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참회의 방법은 성지순례였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새천년을 계기로 너도나도 성지로 참회를 떠납니다. 새천년을 계기로 그동안 지은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성지순례는 중세 유럽을 이해하는 큰 줄기 중 하나입니다. 성지순례 인파로 마을 간 길이 연결되고, 도시가 형성되고, 상업 기능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신에게 종속됐던 시대가 가고 인본주의의 빛이 가느다랗게 스며드는 새로운 중세가 열린 것입니다. 기독교 최고의 성지는 예나 지금이나 단연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었습니다. 파리에서 간다면 4000km가 넘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600년대 말 이후로 이슬람의 땅이었습니다. 그 대신 베드로 성인이 잠든 로마, 야고보 성인이 묻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마르코 성인의 유해가 있는 베네치아 등이 떠올랐습니다.

성지순례 열풍이 불면서 닫혔던 유럽내 지역 간 왕래가 일어나고, 순례객이 지나는 길을 따라 일부 마을이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순례객들이 모여들면서 식당과 여관이 생기면서 상업활동이 활발해진 것입니다. 교회의 첨탑은 멀리서도 금새 알아볼 수 있어 이정표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앞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광장이 생기며 성당이 도시 기능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럽의 광장문화가 바로 여기서 왔습니다.

교회도 높이높이 올라갑니다.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도시마다 낡은 교회를 허물고 크고 높게 다시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는 100여년 뒤 1144년 프랑스 생 드니 수도원을 통해 '고딕(Gothic)' 시대를 여는 기반이 됩니다. 뾰죽뾰죽 치솟은 모습이 기괴해보여 이탈리아에서는 "고트족스럽다"며 조롱했지만 고딕 성당은 '인간이 지상에 구현한 천국의 공간'이었습니다. 내부가 하나의 공간으로 트여 있어 아주 넓고, 위로 갈수록 창이 넓고 많아 내부는 의외로 밝습니다. 특히 석재로 지어진 뾰족한 천장은 동굴에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커다란 울림통 역할을 합니다. 높은 창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앉는 형형색색의 빛은 성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더해 낮고 깊은 울림의 그레고리안 성가가 천천히 울려퍼지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천국에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3. 다시 돌아와 루피노 '리제르바 두깔레 오로 2017(Riserva Ducale Oro 2017)'을 마주합니다. 이 와인은 루피노 리제르바 두깔레의 상위버전으로 빈티지가 좋은 해에만 한정 생산됩니다. 장기숙성이 가능한 그랑 셀레지오네급입니다. 산지오베제 80%, 메를로(Merlot) & 까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20%의 블렌딩 와인으로 잔에 따라진 모습은 전형적인 맑은 루비빛 끼안띠 와인입니다.

잔에서는 제일 먼저 붉은색 기반의 과실향이 올라옵니다. 산지오베제 특유의 새콤한 향과 시원한 삼나무, 옅은 흙내음도 같이 들어옵니다. 잔을 입에 기울이면 신선한 붉은색 베리류와 검은색 과일향이 반깁니다. 질감은 미디엄 바디 혹은 미디엄 라이트 바디 수준으로 굉장히 가볍습니다.
하지만 타닌은 곱게 부서져 존재를 살포시 드러냅니다. 또 시원한 민트향과 약간의 향신료 향도 묻어있습니다.
피니시는 기분좋은 산도와 베리향이 이어지는데 아주 길지는 않습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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