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분해된 ‘동명’ 신화
2023.10.19 18:31
수정 : 2023.10.19 18:31기사원문
튼튼하고 품질 좋은 가구로 유명해진 제재소는 1949년 '동명목재상사'로 이름을 바꿨고 전쟁이 끝난 뒤 복구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외국에서 원목을 들여와 만든 합판이 주한미군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고 수출을 하게 돼 한마디로 대박이 난 것이다(동아일보 1958년 3월 25일자·사진). 단단하고 가벼우며 가공이 쉬운 합판은 인기가 폭발했다. 1960년에는 부산 남구 용당동의 200만㎡ 부지에 새 공장을 지어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세계 최대 합판회사로 도약한 동명목재는 단숨에 국내 재계 서열 1위에 올라 삼성 등 재벌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특히 합판이라는 단일 품목으로 4년 연속 수출 1위를 달성하는 등 수출에 크게 기여해 100억달러 수출을 목표로 내건 박정희 대통령의 칭찬을 들었다. 박정희는 부산에 내려왔을 때 "강 영감 같은 분이 몇 분만 더 계시면 우리나라 경제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을 때 운구에 사용한 국화꽃 장례차를 만들어 서울까지 가지고 간 사람도 강석진이었다.
강석진은 동명산업, 동명개발, 동명식품 등 6개 계열사를 만들어 사세를 확장하는 한편 동명대학과 동명공고를 설립하며 교육사업에도 이바지했다. 부산은행을 세우고 명예회장에 추대됐으며 부산투자금융을 세우는 등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경영난을 겪던 국제신문 재건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전체 사원이 1만여명으로 부산 지역 고용증대에도 기여한 동명목재가 쇠락한 것은 1970년대 말의 자원 민족주의와 오일쇼크 때문이었다. 원목 가격이 오르고 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하루아침에 적자기업으로 전락한 것이다. 동명의 신화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였다. 호화분묘 조성 논란이 빌미가 됐다는 설이 있지만, 강석진은 보안사에 끌려가 강압에 의해 부산은행까지 포함해 경영권을 포기하는 각서를 썼다. 적자를 내고 있었어도 당시 동명목재의 자산은 730여억원, 부채는 530여억원이었으니 문을 닫아야 할 기업은 아니었다.
실의에 빠진 강석진은 화병을 얻어 4년 후 작고했다. 1990년부터 아들 강정남 등 후손들이 소송으로 재산을 되찾으려 했지만 패소했다. 신발 제조업과 함께 부산 경제의 기둥이었던 동명목재의 신화는 그렇게 공중분해됐고 다만 동명학원만 남았다. 비슷한 길을 걸은 재벌이 '왕자표' 신발로 대재벌 반열에 올라섰던 양정모의 국제그룹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