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문' 감독 "사라진줄 알았던 봉준호 첫 영화…살떨렸던 제작기" ②

      2023.10.25 06:03   수정 : 2023.10.25 06:03기사원문
이혁래 / 사진제공=넷플릭스


이혁래 감독 / 사진제공=넷플릭스


(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 '영화광' 청년 봉준호의 20대 시절은 어땠을까. 또 지금의 거장에게 영향을 줬던 영화광들과 함께 했던 그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는 27일 처음 공개되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감독 이혁래/이하 '노란문')는 1990년대 초, 시네필들의 공동체인 '노란문 영화 연구소' 회원들이 30년 만에 다시 떠올리는 영화광 시대와 청년 봉준호의 첫 번째 단편 영화를 둘러싼 기억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노란문'은 지금은 세계적인 감독이 된 봉준호라는 거장의 30년 전 영화 공부의 출발점과 이를 함께 했던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봉준호 감독의 청년 시절과 열정적으로 영화의 숏을 분석했던 자료들, 그가 최초 시사회를 진행했던 단편 '룩킹 포 파라다이스'(Looking for paradise)의 일부 장면도 공개됐다.



'노란문'은 봉준호 감독 이야기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함께 했던 이들이 등장한다.
지금은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당시에는 봉준호 감독과 깊은 열정을 나눌 만큼 청춘의 활기를 보여줬던 영화광들이었다. 이혁래 감독은 "물론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시간들"이라면서도 "혼란스러운 시대이지만 접점이 있는 사람들과의 가치 있는 만남, 관객들도 그런 작지만 행복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는 진심을 전했다.

이들 중심에서 그 기억을 함께 했던 연출자인 이혁래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N인터뷰】①에 이어>

-봉준호 감독이 직접 그렸던 스토리보드나 쇼트 분석 글 등 자료는 어떻게 보존돼 있었나.

▶당시 연출 분과에서 '이번주는 살인이 주제입니다'라고 하면 각자 영화에서 살인 장면을 뽑아왔었다. 봉준호 감독처럼 몇 번씩 돌려보면서 하나하나 그려보기도 했었고, 각각 샷에 대해 감독이 어떤 의도로 연출했을지 토론을 했었다. 그때 영화 '대부'와 '네 멋대로 해라' 등으로 토론을 했었는데 이 토론 결과를 바탕으로 스토리보드를 다시 한번 더 제대로 그린 후 1993년 3월 '노란문' 학술지에 실었다. '노란문' 학술지는 당시 활동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라 몇 명이 갖고 있었다. 원본이 남아있으면 대박인데 학술지가 남아있었다.

-첫 영화 '룩킹 포 파라다이스'도 잘 보존돼 있었나.

▶이 영화가 전체 제작 과정에서 가장 살 떨리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봉 감독이 이걸 못 찾았었다. 봉 감독이 '내가 진짜 보관을 했었는데 없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창피해서 보여주기 싫으니까 일부러 거짓말 하는 거라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이건 어떻게 보면 봉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없어진 것과 같았다. 심각하구나 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런던으로 촬영을 가야 하는데 없어서 더 심각해졌다. 영화를 만들 때 관객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하려면 뭔가 중요한 홍보 포인트가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의 첫 번째 홍보 포인트는 '이제껏 공개된 적 없던 봉준호 감독의 첫 번째 영화를 보여주겠다'가 아닌가. 이걸 빼면 제작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커진다. 가장 중요한 게 없어진 거였다.

-영화를 어떻게 찾았나.

▶그러다가 에드거 앨런 포가 쓴 '도둑 맞은 편지'가 생각났다. 그 소설을 보면 트릭이 있는데, 누구나 다 찾을 수 있는 곳에 놔서 완벽히 숨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봉 감독에게 '도둑 맞은 편지'처럼 찾아보라고 했더니 며칠 뒤에 연락이 왔다. 그 힌트 덕에 찾았는데 너무나 정직하게 보관하고 있었다더라. 일본에서 나왔던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 DVD에 꽂혀 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재생이 안 되더라.(웃음) 제가 다 돌아다니면서 복구가 가능한지 알아봤고, 다행히 한 업체에서 복구를 해줬다.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이 작품이 '노란문'에서 어떤 의미일까.

▶제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추억 보정이 들어간 거라서 지금 이 작품을 보면 그 정도의 느낌은 아닐 거다.(웃음) 하지만 그때 우리가 봤을 때는 공부한 게 공부로 끝난 게 아니라 공부할 때 봤던 영화들처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었다. 저도 저 나름대로, 30년 동안 그 영화를 계속 기억했다. 다시 보니까 기억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더라.(웃음) '우리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만들어지기도 하는구나' '그것이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네' 했었다. 당시에는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그 영화 얘길 했다.

-영화에서 VHS가 자주 등장한다. 영화 덕후 봉준호를 의미하는 장비 같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그 시기를 상징하는 뭔가를 잡곤 한다. 그게 특정 영화일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있다. 그때를 상징할 수 있는 건 VHS가 아니었나 한다. VHS는 뭔가 아쉽고 부족한 매체였다. 지금은 집과 극장에서의 관람이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바로 출시된 비디오가 아니라 어디서 가져온 비디오를 카피해서 컬러 영화였는지 흑백이었는지 구분 못할 정도의 화질로 봤었다. 그때 VHS라는 것이 그 당시 영화광들의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비가 아닐까. 등장인물의 얼굴 조차 구분 안 되고 자막도 없는데도 집중해서 봤던 그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비인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 시절은 어쩌면 지금만큼이나 큰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갈곳을 몰라했고, 내일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던, 그렇게 혼란스럽던 시기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1988년까지도 해외여행을 못 갔다. 90년대는 그게 확 열리던 시기였고 혼란스러웠지만 같이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던 게 제게도 행운이었다. 지금도 이 시대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접점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거기서 뭔가 좋아하는 마음으로 공유를 하고 만남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교훈을 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그런 작지만 행복한 경험들이 있었다.
경험들을 어떤 분야든지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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