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는 돼지고기로 OOO를 만들었다
2023.10.28 06:00
수정 : 2023.10.28 06:00기사원문
소동파(蘇東坡)는 1039년에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소식(蘇軾)인데, 호가 동파(東坡)여서 사람들은 보통 소동파로 불렀다.
1068년, 북송 때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중앙에서는 왕안석에 의해 신법(新法)이 시행되었다. 소동파는 신법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중앙관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그는 실망한 나머지 중앙정치를 멀리하고자 지방 근무를 자처했다.
소동파는 시 짓기를 좋아했는데, 간혹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시로 쓰기도 했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 율(律)은 바로 중앙정부의 신법을 지칭했다. 은유적인 표현이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중앙의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1079년, 소동파는 중앙정치를 비판한 죄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후 황주(黃州, 현재의 후베이성 지역)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제 정치에 관여해서도 안되고 그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황주에서는 생활은 어려웠다. 부인은 양잠을 해서 살림을 도왔고, 소동파는 인근 병역지였던 땅을 얻어 농사를 지어 곡식을 얻었다. 그 땅이 황주성 동쪽에 있어서 그는 이 지역을 동파(東坡)라고 불렀다. 그래서 훗날 소동파를 동파거사(東坡居士)로 부른 연유다.
황주로 유배되다시피한 소동파의 삶은 청경우독(晴耕雨讀) 생활 그 자체였다. 비가 개서 맑은 날은 논밭을 갈았고 비가 오는 날은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동파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돼지고기'였다.
황주에는 돼지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돼지를 기르면서도 요리를 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냥 물에 삶아 익혀 먹는 것이 전부였다. 돼지고기는 흔하고 값이 싸서 집을 짓는데 사용되는 진흙만큼의 가치 정도였다.
지금과 달리 송나라 때만 해도 돼지고기는 천대받았다. 당시 부자들은 주로 양고기를 즐겨 먹었고 양고기는 비쌌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는 개고기나 돼지고기를 양고기로 속여서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양고기와 돼지고기는 같은 고기지만 약성에 차이가 있었다. 양고기는 기운이 뜨겁고 돼지고기는 서늘하다. 그래서 양고기는 열을 내기 때문에 허한(虛寒)에 좋고, 돼지고기는 반대로 열을 내리고 음을 북돋아 주기 때문에 자음(滋陰)시킨다. 특히 돼지고기는 단석(丹石)의 독을 눌러 열독(熱毒)로 인해서 혈맥(血脈)이 막힌 것을 치료하기 때문에 광물질 약물을 많이 먹는 경우에 해독작용이 있다.
양고기는 원래 추운 북쪽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 고기라면, 돼지고기는 바람이 많이 불고 건조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좋다고 할 수 있다. 황주는 따뜻한 내륙지방이어서 돼지고기를 즐겨 먹어도 좋을 법했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살집이 많고 기운이 나게 하기 때문에 농사일을 하면서 힘쓰는 농부들에게 도움이 될 만했다. 그러나 요리방법을 모르니 즐겨 먹지 못한 것이다.
사실 소동파는 요리를 별로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도 아침마다 돼지고기를 삶아 먹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생돼지고기는 상하지 않게 간장에 쟁여두었다. 돼지고기는 흔한 만큼 남아돌았고 보관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았다. 간혹 포(脯)로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며칠 안에 먹을 생고기는 간장에 쟁여두는 것이 편했다. 간장에 쟁여둔 돼지고기도 삶아 먹으면 간이 되어서 먹을만 했다.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동파, 오랜만에 바둑이나 한판 두세.”라고 했다.
소동파는 바둑을 두면서도 친구에게 대접할 것이 마땅하지 않아 간장에 재워 놓은 돼지고기를 삶아 주기로 했다. 그는 솥에 물을 붓고 간장에 쟁여진 돼지고기를 넣고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 둘은 바둑을 두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솥에서는 짭조름한 김이 솔솔 올라왔다. 냄새를 맡은 소동파는 솥 안에 돼지고기를 넣어 둔 것을 알고 깜짝 놀라서 들여다보았다. 다행스럽게 타지는 않았고 단지 자작하게 졸여져 있었다. 돼지고기는 간장색 때문에 붉은 기운이 돌았고 평상시보다 더 오랫동안 익혀져서 수분이 빠져서 꼬들꼬들해졌다.
그런데 평상시 먹던 돼지고기 맛이 아니었다. 간장에 졸여진 돼지고기의 맛은 기가 막혔다. 친구는 “동파,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는 처음 맛보네. 이것이 그 흔한 황주의 돼지란 말인가? 어떻게 요리한 것인가?”하면서 놀라워했다.
소동파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간장에 쟁여진 돼지고기를 약한 불로 익혀 졸여서 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갖은 양념과 채소를 곁들여서 풍미(風味)를 더했다. 소동파는 술은 싫어했지만 이렇게 붉게 익은 돼지고기를 좋아했다. 간장에 졸여져서 붉게 익은 돼지고기. 그는 이것을 홍소육(紅燒肉)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동파는 홍소육을 맛있게 먹고 나서 시를 한 수 지었다. 시의 제목은 바로 ‘식저육(食猪肉): 돼지고기를 먹다’였다.
손을 깨끗이 씻고 물을 조금 넣으며(淨洗鐺, 少著水),
땔감에 불은 붙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다(柴頭罨煙焰不起).
스스로 익기를 기다려 재촉하지 않으니(待他自熟莫催他),
불을 지피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익혀진다(火侯足時他自美).
황주의 맛 좋은 돼지고기는(黃州好豬肉),
값은 진흙처럼 싸다(價賤如泥土).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貴者不肯吃),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네(貧者不解煮).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대접에 가득 채워놓고(早晨起來打兩碗),
배불리 먹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나(飽得自家君莫管).
소동파는 아침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만으로 안분지족했다.
황제 신종이 서거한 이후 소동파는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 그런데 1089년에 정쟁에 휘말리면서 다시 항주(杭州, 현재의 저장성 지역) 지주로 좌천이 되었다. 당시 항주에는 여름만 되면 물난리가 잦았다. 소동파는 항주 지주로 부임하자마자 서호(西湖) 바닥의 진흙을 파내서 둑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 해에는 물난리가 나지 않았다.
항주 주민들은 소동파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술과 돼지고기를 올렸다. 소동파는 술은 즐기지 않았기에 술은 사양했지만 돼지고기만큼은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돼지고기를 이용해서 황주에서 만들어 먹었던 식으로 간장에 졸이고 양념을 넣어 불에 나직하게 졸여 익혀서 주민들에게 나눠 먹도록 했다. 항주 주민들은 그 맛에 감탄했다. 그래서 소동파(蘇東坡)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 돼지고기 요리를 동파육(東坡肉)이라고 불렀다.
이후로 항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동파육을 만들어 먹었다. 소동파 때문에 사람들은 북쪽 지방의 돼지인 북저(北猪)는 맛이 없고, 남쪽 지방의 남저(南猪)를 향저육(香猪肉)이라고 하면서 높게 평가했다. 똑같은 재료라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 제목의 ○○○은 ‘동파육(東坡肉)’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동파집(東坡集)>食猪肉詩. 淨洗鐺, 少著水, 柴頭罨煙焰不起. 待他自熟莫催他, 火侯足時他自美. 黃州好豬肉, 價賤如泥土. 貴者不肯吃, 貧者不解煮. 早晨起來打兩碗, 飽得自家君莫管. (돼지고기를 먹으며. 손을 깨끗이 씻고 물을 조금 넣으며 땔감에 불은 붙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다. 스스로 익기를 기다려 재촉하지 않으니 불을 지피고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익혀진다. 황주의 맛 좋은 돼지고기는 값은 진흙처럼 싸다.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는 요리할 줄 모르네.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대접에 가득 채워놓고 배불리 먹으니 그대는 신경 쓰지 말게나.)
<동의보감>○ 羖羊肉. 性大熱一云溫, 味甘, 無毒. 治虛勞寒冷, 補中益氣, 安心止驚, 開胃肥健. (숫양의 고기. 성질이 아주 뜨겁고 따뜻하다고도 한다. 맛은 달며 독이 없다. 허로와 한랭을 치료하고, 중기를 보하며, 마음을 안정시켜 놀란 것을 멎게 하고, 식욕을 돋우어 살지고 튼튼하게 한다.)
○ 豚肉. 性寒一云涼, 味苦, 微毒. 解熱. 療熱閉血脉. 弱筋骨, 虛人肌, 殺藥, 動風, 不可久食. 療水銀風, 壓丹石毒. 食能暴肥, 此盖虛肌故也. (돼지고기. 성질이 차고 서늘하다고도 한다. 맛은 쓰며 약간의 독이 있다. 열을 풀어준다. 열로 혈맥이 막힌 것을 치료한다. 근골을 약하게 하고 기육을 무르게 하며, 약 기운을 죽이고 풍을 동하게 하니 오래 먹으면 안 된다. 수은 중독과 단석의 독을 치료한다. 먹으면 갑자기 살이 찌는 것은 기육이 물러지기 때문이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