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금 울리는 절정의 아리아, 가을밤 물들이다

      2023.10.27 08:56   수정 : 2023.10.27 08:58기사원문

암흑이 깔린 무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푸른빛 조명이 비추자 영혼을 뒤흔드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3000석 대극장 구석구석까지 힘차게 울려퍼졌다. 프로 데뷔 20년 만에 첫 고국 오페라 무대에 오른 테너 이용훈은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종횡무진 넓은 무대를 누비며 폭발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파이낸셜뉴스와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주최한 서울시오페라단의 오페라 '투란도트' 무대에서다.

클래식 애호가들의 뜨거운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26일 개막한 이번 공연은 '칼라프'로 완벽하게 변신한 이용훈을 비롯해 세계 최정상급 성악가들이 총출동, '투란도트'에 새로운 혼을 불어넣었다.

'투란도트'는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으로, 1926년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용맹한 왕자 칼라프가 얼음같이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와 목숨을 건 수수께끼 대결을 벌이며 결국 사랑을 쟁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 세계에서 상연되는 극의 대부분은 칼라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투란도트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연극계 거장 손진책 연출이 참여한 이번 서울시오페라단 버전은 이 결말을 시녀 '류'에 초점을 맞췄다.


푸치니 서거 100주년인 2024년을 앞두고 선보인 '레지테아터(원작의 시공간을 재해석한 공연)' 무대에 투란도트 마니아들의 관심도 한껏 쏠렸다. 손 연출은 이번 '투란도트' 3막 1장까지의 무대를 죄수들이 갇힌 감옥과 같이 암울한 분위기의 지하세계로 그려냈다. 극의 배경을 중국이 아닌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골들이 나뒹구는 설치물을 활용해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 연출했다. 이따금씩 무대 뒤편으로 희망을 상징하는 달이 뜨지만 달은 이내 지며 절망과 공포를 드리운다.


음산함이 지배한 무대. 하지만 과감하고 화려한 오페라 선율과 아리아들이 절정에 다다를 때마다 객석에서는 끊임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정적이면서도 힘찬 음색을 지닌 '리리코 스핀토 테너' 이용훈의 목소리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푸치니의 음악을 한층 더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3막 1장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부르는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단연 압권이었다. 소프라노 이윤정(투란도트 역)이 보여주는 섬세한 카리스마와 베이스 양희준(티무르 역)이 들려주는 깊고 단단한 음색도 극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배가시켰다.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푸치니가 차마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3막 2장에서 펼쳐졌다. 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세상에 퍼져나가며 어둠의 공간이 빛의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되며, 폐허는 낙원으로 뒤바뀌었다. 혼이 끊길 듯 구슬프고 애절하게 노래하는 류의 모습은 칼라프가 손에 쥐게 될 사랑 너머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와 숙제를 관객들에게 안겨준다.
공연 마지막 군중의 외침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사랑은 세상을 밝히는 빛! 햇살 아래서 기뻐하며 노래하자!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이번 공연에는 권력에 아첨하며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는 '핑' '팡' '퐁' 등 보다 다양한 캐릭터와 계급이 등장한다.
붉은색과 검은색, 희망을 상징하는 푸른색이 대비를 이루는 주연들의 무대의상과 그로테스크한 무드의 안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연은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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