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핑퐁 외교' 냉전질서 바꿔… 한국과도 70년 넘는 인연
2023.11.30 18:22
수정 : 2023.11.30 18:22기사원문
■독일 출생, 미국 이주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1938년에 나치 독일을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키신저는 194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미군에 입대하여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미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키신저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뒤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했으며 정부 업무에도 협력했다. 그는 1969년에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키신저는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지극히 현실적인 외교관을 내세웠다. 그는 같은 공산 진영이었던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점차 벌어지자 이를 이용, 공산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손잡아 소련을 고립시키려 했다. 1971년 7월 극비리에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났고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을 이끌어냈다. 그는 동시에 소련과 데탕트(긴장완화)를 추진했으며 1969년부터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 협상을 주도하여 1972년 협정을 맺었다.
■데탕트 추진·베트남전 종전협상 주도
키신저는 1973년 국무장관에 올랐고 다음해 출범한 제너럴 포드 정부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미국을 끌어내기 위해 북베트남과 종전 협상을 주도했으며 1973년에 베트남 정치가 레 둑 토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는 같은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도쿄 납치 사건 당시 그의 석방을 중재하기도 했다.
그는 1975년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4자 회담을 개최를 제안했고 이후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과 만났다. 키신저는 1977년 지미 카터 정부 출범 이후 국무장관에서 물러났지만 1982년 키신저 어소시어츠를 설립하고 왕성한 저술 및 연구,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는 2016년 대선 후보였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나 외교 정책을 조언했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손잡는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칭찬했다. 키신저는 2018년에 이어 올해 7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키신저는 지난 5월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3차 대전이 5~10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애도
키신저의 타계가 알려지면서 애도가 줄을 잇고 있다. 생전에 고인과 가까웠던 정치인들은 물론 이른바 '핑퐁 외교'를 통해 '죽의 장막'을 열었던 당사자기에 중국에서도 그를 기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외교 문제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고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하나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탈출해 미군에서 나치와 싸웠던 한 사람(키신저)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면서 "난민 출신의 그가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것은 미국의 위대함 못지않게 그의 위대함을 말해준다"고 강조했다. 중국 관영 CCTV는 "키신저는 중미관계 발전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1971년 당시 닉슨 대통령의 특사 겸 국가 안보 보좌관 자격으로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키신저는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이어 "키신저는 '중국인들의 라오펑요우(오랜친구)'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었다"고 전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