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국정철학을 세워야 할 이유

      2024.01.15 18:23   수정 : 2024.01.24 09:00기사원문


현 정부의 급선무 과제는 국정철학의 정립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1년8개월이 넘었으나 아직 미완성이다. 대통령실 홈피에 국정 비전과 과제가 주욱 열거되어 있지만, 이 많은 것을 묶고 연결하는 국정철학은 불분명하다.

최근 신년사에서도 국정철학을 찾기 힘들다. 경기·고용·물가·무역·기술·노동·교육·연금 등 민생 현안이 강조되었으나 산만히 흩어져 있다.
전체 그림은 잘 다가오지 않는다. 반복해 읽어도 휑한 느낌이 들고 확 잡히는 게 없다.

국정철학이란 시대상을 반영해 국가를 어떤 방향과 방식으로 이끌고 어떤 가치를 실현할지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식을 뜻한다. 각종 정책·제도·규범이 나오는 원천이자, 이것들이 상호 정합성을 갖춰 전체적 조화를 기할 수 있게 해주는 틀이자 이것들을 실천해 효과를 낼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한때 동의어였던 국가이념이란 표현은 과도한 국가주의적 뉘앙스를 띠는 데다 경직된 좌우 진영논리로 오염돼 이제 사용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국정철학은 근본적·거시적·추상적으로 정체(政體)를 압축 요약하는 가운데 정부·시장·시민사회 관계, 국가·개인 관계, 정치·행정·사법 관계, 외국과의 관계를 규정한다.

윤 대통령 취임 초 강조됐던 자유민주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 맥락에 맞는 정교한 체계화까지는 못 가고 수사적 표어에 머물렀다. 단지 자유를 외쳐선 안 되고 그 개념을 적실성 있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민주주의 정체에 녹여 내야 한다. 그나마 근래엔 수사적 언급조차 사라졌다. 이번 신년사에 민주주의는 딱 1회 나오는데 "핵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지나가듯 전제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국정철학의 경시는 말보다 실천, 추상적 담론보다 구체적 민생, 과정보다 결과를 앞세우는 입장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입장은 얼핏 일리 있고 설득력 강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숙고해 보면 국정철학의 부재는 심각한 폐해를 낳는다. 첫째, 정부의 각 정책과 제도가 서로 정합성·응집성·체계성 있게 연결되지 않아 국정 전반의 효과성·효율성이 실추된다. 둘째, 국정은 여러 문제에 단발적으로 임기응변하는 수동성을 띠게 되고 명확한 목표로 일관되게 나아가는 적극성을 잃는다. 셋째, 개별 정책이나 제도가 성과를 내도 조각조각 분산돼 나타나므로 국민에게 공(功)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국민적 불신이 커진다. 넷째, 오늘날 정치 양극화 시대에 특히 심각한 문제로, 국정철학의 실종은 여야 대립을 선악 대결과 권력싸움으로 전락시킨다. 집권 세력은 명료한 국정철학에 입각한 정책을 세워 국정을 운영하고 반대 측은 다양한 정책 차원의 이의를 제기해서 체제 전반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게 민주주의의 이상적 모습이다. 반면 국정철학이 없다면 여야는 합리적 정책대결이 아니라 감정·정서에 기반한 전면적 선악 대결, 집권에만 절대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싸움에 빠지게 된다. 근래 정치 양극화를 격화시키는 여러 근본적 원인이 있지만, 국정철학의 부재는 야권 내의 문제들과 함께 상황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정철학 정립이 쉬울 리 없다. 시대가 복잡하고 급변할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시대가 그럴수록 국정철학을 세워야 한다. 안 그러면 상기한 폐해로 국가가 도탄에 빠진다.
현 정부는 이제라도 노력해야 한다. 시대의 전환기적 특성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정부·시장·시민사회 관계는 어때야 할지, 국가와 시민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 삼부(三府)는 어떻게 맞물려 작동해야 할지 체계적·종합적 인식 틀을 정교하게 세워야 한다.
개인도 그 나름의 철학이 있어야 주체적 삶을 살 수 있듯이, 국가도 국정철학을 갖춰야 온갖 불확실한 돌발변수 속에서도 중심을 지켜나갈 수 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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