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째 흔들린 도요타… 품질 사기 부른 '상명하복 고질병'
2024.02.04 19:03
수정 : 2024.02.05 03:43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도쿄=김경민 특파원】 세계 1위 완성차 업체인 일본 도요타자동차그룹에서 잇따라 품질 사기 행각이 적발되면서 장인 정신을 자랑해온 일본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고 있다. 단순히 계열사 한 곳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도요타그룹 전반에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가 만연하다는 지적이다. 도요타는 재발 방지를 위해 공장 가동 시간을 30분씩 줄여 품질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수십년간 경직된 수직적 조직문화를 손보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35년간 속여 1등까지 오른 도요타
4일 일본 주요 언론에 따르면 도요타 계열사인 도요타자동직기, 다이하쓰, 히노자동차 등 품질 부정 이슈가 연이어 터지면서 현지에서는 '메이드 인 재팬'의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30일 도요타는 디젤엔진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계열사인 도요타자동직기가 품질인증을 위한 출력시험 등 과정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도요타는 랜드크루저, 프라도, 하이에이스 등 10개 차종의 출하 중단을 결정했다. 앞서 지게차용 엔진 배기가스 시험 부정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자동차용 엔진 3종에서도 부정이 판명된 것이다. 도요타의 경차 부문 자회사인 다이하쓰도 지난해 4월 부정한 품질인증 문제가 불거진 뒤 추가 조사를 거쳐 1989년부터 64개 차종의 충돌·배기가스·연비 시험 등 과정에서 174건의 부정이 이뤄진 사실을 발견했다. 35년간 지속된 품질 사기가 이제야 드러난 것이다.
이 문제로 지난해 12월부터 다이하쓰의 일본 내 4개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다이하쓰는 현재까지 국토교통성으로부터 대대적인 조사를 받고 있다. 또 2022년에는 도요타의 트럭 부문 자회사인 히노자동차가 배출가스·연비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 형식 지정이 취소됐다. 지난달 말에 도요타는 부품 내구성 문제로 '야리스', '아쿠아', 시엔타' 등 3개 차종 79만대의 리콜을 신고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6월에도 부품 결함으로 차량 59만대를 리콜한 바 있다.
■결국 곪아 터진 '까라면 까' 조직문화
도요타가 인수해 계열사가 된 히노, 다이하쓰의 부정까지만 해도 모회사인 도요타는 '계열사 관리 부실에 대한 책임'으로 한정해 사과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룹의 모태인 도요타자동직기마저 부정 이슈에 연루되자 그룹 전체 프로세스의 심각한 결함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양상이다. 도요타는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으로 전 국민적 사랑을 받는 기업인 만큼 배신의 충격도 적잖은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창업주 가문 4세인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잃어버렸다. 고객 신뢰를 배신하고 인증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엄중한 일로 받아들인다. 책임자로서 그룹의 변화를 이끌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부정이 거듭 적발되며 일본 사회에선 도요타 사내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문제가 반복될 것이란 의견이 주를 이룬다. 가장 윗선인 도요타가 계열사에 주문을 넣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반드시 납기를 채워야 하는 조직문화가 이번 사태를 야기시킨 본질이라는 것이다.
실제 도요타 내부조사 보고서에서도 직원들은 "생산 일정을 늦추면 회사에 피해를 주게 된다"거나 "개발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등으로 증언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설에서 "도요다 회장이 사과했지만 최고경영진으로서 그룹 내에 만연한 사기를 구체적으로 근절하는 방법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며 "추가 비리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는 '내가 아는 한 아니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고 꼬집었다. 닛케이는 이어 "문제 해결을 각사에 맡길 것이 아니라 도요다 회장이 이끄는 경영진이 그룹의 개혁을 이끌어야 한다"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전면적인 거버넌스 체계 개편 등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10% 손해봐도 생산 30분 단축
도요타는 개선 방안의 일환으로 '천천히 꼼꼼하게 생산해 품질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도요타는 올해 일본 내 완성차 공장 가동시간을 전체적으로 30분씩 줄이기로 했다. 생산 현장에서 여유를 갖고 작업할 수 있게 해 품질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내 도요타공장은 일반적으로 1일 2교대제로 운영되며 8시간씩 근무하고 물량에 따라 잔업한다. 가동시간 상한은 생산 계획에 따라 생산 라인마다 정해져 있는데 이 중 잔업 시간 상한을 30분 단축하려는 것이다. 요미우리신문은 "인기 차종은 정시 외에도 잔업으로 생산하는데 부품 부족이나 별 문제가 없는 평시에 가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단축한 30분은 직원이 일찍 퇴근하거나 기기 점검, 연수 등에 사용할 수 있다. 공장 가동시간 단축에 따라 인기 차종을 가동률이 낮은 다른 공장 라인에서도 생산하는 등 융통성있게 수요에 대응하는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다.
도요타는 또 빡빡한 개발 일정이 품질 인증 부정으로 연결됐다는 판단에 따라 신형차 개발 기간을 조금 더 늘리는 등 개발 계획도 일부 재검토에 들어갔다. 자회사를 포함한 도요타그룹 전체의 세계 신차 판매량도 지난해 1123만대에서 10%가량 줄이는 것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