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현장 규제 풀고 연구자에 명확한 권한·책임 줘야"
2024.02.07 18:42
수정 : 2024.02.07 20:43기사원문
정부가 성공적인 과학기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들에게 명확한 권한과 무거운 책임을 줘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현장에서 연구개발(R&D) 혁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산학연의 연구 지원체계도 혁신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초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서 세계를 선도할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연구에 연구개발(R&D) 예산을 과감히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정치와 경제분야의 잣대로 과학기술 정책과 예산을 결정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이에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회의실에서 강병철 서울대 연구처장과 이인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본부장, 손병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부원장, 엄미정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과 함께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정부와 산학연의 역할'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
―정부가 혁신적·도전적 연구에 과감한 예산 투입을 밝혔는데 고려해야 할 점은.
▲강병철 서울대 연구처장=국가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핵심 분야의 경쟁력을 갖도록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기초 기반 연구에서 거기에서 핵심 분야 경쟁력이 되는 원천 기술이 나올텐데, 너무 단기적 성과만 집중하는게 아닌지 우려된다. 정부 R&D 정책 방향을 보면 12대 핵심 전략 분야와 보건의료 연구비는 늘었지만, 나머지 분야는 줄었다. 물론 그동안 대학 지원 연구비가 많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은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대학의 중요한 기능은 인력 양성과 기초원천 연구다.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최근 들어 이공계 기피 현상 심해지고 있다. R&D 예산 삭감이 걸림돌로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인환 NST 본부장=국가과학기술연구회에는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위한 크고 작은 25개 출연연구기관이 있다. 연구기관들의 예산은 출연금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운영이 안돼 연구과제중심제도(PBS)를 통해 연구비와 인건비를 충당하기도 한다. PBS 과제 상당수가 2~3년, 소형 과제이다 보니 과제 수주를 위한 시간을 많이 낭비하게 된다. 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이 큰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출연금이든 PBS든 대형 과제를 장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손병호 KISTEP 부원장=연구현장에서 R&D 혁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산학연의 연구 지원체계에 변화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은 세계적 연구그룹이나 대학단위별로 하는 연구비 지원 체계로 변화를 줘야 한다. 지난해 공공기관에서 빠져나온 4대 과학기술원을 중심으로 여러 연구 교육을 시험해 모델을 만들고, 전체 대학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또 기업 R&D는 하나를 하더라도 규모를 늘려 기술로 승부하는 딥테크 벤처나 기술력을 충분히 갖춘 우수 기업 연구소 등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들이 하기 어려운 차세대 비즈니스 모델이나 차세대 사업 창출하기 위한 도전적인 R&D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엄미정 STEPI 선임연구위원=과학기술계에서는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20년전에도 얘기했다. '그런데 여태껏 왜 안됐을까'에 대한 본원적인 진단없이 비전만 있다는게 문제다. R&D는 짧아도 3년, 길면 10년의 장기적인 구조 속에서 이뤄져야 좋은 성과가 나온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지금 대학과 출연연구기관도 10년이 필요한 연구를 1년 만에 보여달라는 평가 제도와 시스템에 답답해 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계의 특성에 맞춰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게 맞다. 예를들어 '10년간 묻지 않을게, 10년뒤 결과는 너희들이 책임져'라고 한다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역대 정부들이 모두 협업을 얘기했지만 실패한 이유는.
▲강 처장=큰 슈퍼마켓을 못하고 구멍가게만 차리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교수의 승진 심사든 연구비 심사든 평가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기여한 질적인 부분은 인정하지 않고, 주저자로 논문을 썼는지, 제1저자인지만 따지고 평가할뿐이다. 승자독식으로 끝나는 현실에서는 협업이 안된다. 같이 연구한 성과물에 대해 크레디트 나눠주고, 기여를 인정하는 문화가 돼야 한다.
▲이 본부장=국가 전략기술처럼 큰 프로젝트를 출연연구기관이 책임지고 대학과 기업의 최고 우수 연구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면 협력을 통해 큰 성과도 나올 수 있다. 지금은 대학과 기업, 출연연구기관 모두가 작은 R&D 과제를 놓고 수주경쟁을 하다보니 협업이란 있을 수 없다. PBS가 갖고 있는 문제는 단기적이고 적은 예산으로 이뤄진 R&D 과제다. 과거 프로젝트 기반의 대형 R&D 사업을 통해 코드 분할 다중 접속(CDMA) 이동통신 기술이 시장에 나올 수 있었던 거다.
▲손 부원장=이제 대학이나 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연구비 펀딩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출연연구기관은 법인체계로 있다보니 사실 기관 간에도 벽이 많다. 또 과기정통부의 기초연구 예산 중 80% 이상은 대학으로 들어간다. 앞으로 대학원생 감소가 불가피해 교수들이 컬래버레이션 해 도전적 연구를 해야 하는데 대학 교수 실험실 단위의 연구비 지원이 가로막고 있다. 최근 일본도 대학의 연구 경쟁력이 하락해 '국제 탁월 대학' 프로그램을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을 10개 정도를 육성하겠다며 10조 엔 정도의 펀드를 만들었다. 이를 주목해야 한다.
▲엄 연구위원=R&D 예산은 커졌는데 평가 시스템은 바뀐 적이 없는데 그 밑바탕에는 신뢰의 문제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성과에 대해 평가한 것을 믿을 수가 없고 모르니 다 배제한다. 결국 객관적 수치인 논문 개수만 세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평가에 대한 전문가 사회의 신뢰도 부분이 감사라는 간섭으로 인해 저해되는 것이다. 감사는 감사원이나 기재부, 국회의 롤로 진행된다. 그 잣대가 들어오면 모든게 다 무너진다. 그래서 비 과학기술계에게 과학기술계의 속성과 특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감사는 왜 이렇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뿐이다.
―인구감소 시대를 앞두고 대학원생의 확보와 인재양성 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
▲강 처장=박사 과정생의 인건비가 한 달에 50만원도 못 받는 이공계 학생들이 10%에 달하고 인문 사회계는 말할 것도 없다. 요즘 MZ세대들은 대학원 생활에 내 청춘을 갈아넣어서 바치는데 그만큼 가치가 있는가를 엄청 따진다. 그런데 정부 정책은 못 따라가는 형편이다. 학생 인건비 지원 방향이 개선돼야 한다. 예를 들면 연구비에 인건비를 포함할 것이 아니라 대학원 숫자에 따라 국가에서 예산을 확보하는 것에 따라서 블록 펀딩 형식으로 그냥 대학에 주는 것이다. 과기정통부도 이달 인력 양성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했는데 이 문제도 담았으면 한다.
▲엄 연구위원=대학 구조조정을 할때 대학원에 대한 논의는 없다. 교육부와 과기정통부가 협의해서 어디를 살려야 할지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제 약간 방치 상태다. 과기정통부는 단순하게 상위권의 연구 잘하는 데 살리면 된다고 말한다. 이건 그냥 인기순위로 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꼭 상위권 석박사만 필요한 나라는 아니다. 스타트업부터 중소·중견·대기업까지 있듯이 기업의 석박사 수요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졸업한 학생들의 수요구조를 기반으로 대학원 다운사이징이 이뤄져야 한다.
▲손 부원장=연구비가 단순히 R&D로 끝날게 아니라 인력 양성과 병행되게 해야 한다. 복지부가 내년도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소위 스카이라 불리는 대학의 이공계 학생들이 많이 이탈할 것이다. 이들은 거의 다 의대 가려고 다시 공부하는거다.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 가는 걸 당장은 못막는다. 의사가 되는 게 힘들고 어렵지만 되기만 하면 평생 직장이고 많이 번다. 정부의 R&D 정책이 지금까지 기술개발 중심의 투자였다. 이제는 이름 없이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그다음 비정규직 젊은 연구원들이 과학기술계에서 이탈하지 않고 계속 있으면서 질적 향상을 위한 투자에 더 큰 비중을 둬야 한다.
―과기정통부가 출연연구기관의 연구 과제와 프로젝트를 NTC 중심으로 하려는데 고려할 점은.
▲이 본부장=방향은 맞다고 본다. 양자기술의 경우 밖에서 바라봤을때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똑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각각의 기술 파트가 다 다르다. 이것을 NTC로 묶어 관리하면 중복성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해소될 것이다. 연구자, 출연연구기관 뿐만아니라 대학과 기업도 여기에 참여해 같은 테마로 R&D를 진행해야 한다. 곧 NTC가 가동될텐데 운영 관리 차원에서의 통합 플랫폼을 만들어 소프트웨어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손 부원장=실질적으로 NTC의 성공은 과연 가장 핵심적인 인력들이 서로 뭉칠 수 있느냐, 화학적인 결합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정부가 이런 부분을 제도적으로 많이 서포트를 해줘야 한다. 각각의 연구기관이 법인체로 돼 있어 핵심적인 연구그룹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는게 쉽지 않다. 다행히 이번에 출연연구기관이 공공기관에서 빠져나와 이전보다는 인력이나 예산 운용에 있어 자율성이 높아졌다. 지금까지 기관간 벽을 허물기 위해 융합연구 사업단을 별도로 만들어 운영했다. 연구기관들은 이 융합연구사업을 출연금 이외 플러스알파 예산을 받는 과제로 생각했다. 이제 NTC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연구기관의 존폐 위기를 고민해야 한다. 현재 몇몇 연구기관은 NTC 중심으로 조직개편이 이뤄지고 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김준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