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백화점' 미도파

      2024.02.15 19:15   수정 : 2024.02.15 19:15기사원문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미도파(metopa·美都波)'라는 백화점이 있었다. 2003년 11월 롯데백화점에 인수되었으니 롯데화(化)된 지 20년이 흘렀다. 지금보다 더 화려하고 흥청대던 수십년 전 서울의 중심가 명동 입구에서 보면 길 건너 미도파백화점의 조명 장식이 롯데백화점의 불빛보다 먼저 시선을 끌어당겼다.

'미도파'가 '도레미파솔'에서 따온 말인 줄 알았더니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대도시)의 한자식 차음(借音)이란다. '아름다운 도시의 물결'이라고 그럴싸하게 풀이하기도 한다.


롯데백화점(롯데쇼핑)이 문을 연 것은 1979년, 이제 45주년이다. 미도파의 출발은 1933년이었으니 91년, 세월의 길이만 따지면 두 배다. 롯데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세계, 화신과 함께 서울의 3대 백화점으로 꼽히던 미도파였다. 세 백화점의 운명도 엇갈린다. 1963년 삼성그룹에 인수된 뒤 1997년 분리된 신세계는 지금까지 백화점 업계의 선두권을 지키며 건재하지만, 종로에 있던 화신은 경쟁에서 밀려 건물까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미도파는 롯데에 의해 젊은 층을 상대로 하는 패션백화점 '영플라자'로 거듭났다. 최근 영플라자 건물 전체를 식품관으로 리뉴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아직 후속 움직임은 없다. 1963년 연말 신문에 실린 광고(조선일보 1963년 12월 14일자·사진)를 통해 60여년 전인 당시의 백화점 내부를 엿볼 수 있다. 의류, 가전제품, 문구, 화장품, 귀금속 등은 현재의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서점, 세탁소, 약국, 병원도 있었고 고무신 판매점 정도만 특이하다. 그 시절에 백화점 상품권 판매소가 있었다는 것도 좀 의외다.

미도파의 출발점은 일제강점기의 '조지야(丁子屋) 양복점'이었다. 1904년 일본에서 건너온 고바야시 겐로쿠라는 상인이 차린 점포다. 양복점의 위치가 현재의 영플라자 자리다. 조지야는 영업이 잘되어 양복점에서 백화점으로 변신했다. 명동이 서울의 번화가로 발전하면서 사세는 더욱 커져 갔다. 백화점을 지금의 건물로 신축한 것은 1939년이었다. 건물의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 광복 후 정부 재산이 되어 무역협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69년 대농그룹이 인수하기에 이른다.

명동이라는 최상의 위치를 자랑했던 미도파는 백화점의 선두를 지켰고,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김화복, 박미희라는 선수 이름과 184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미도파 배구팀도 유명했다. 1975년 국내 백화점으로서는 처음으로 상장한 기업도 미도파였다. 미도파도 명동에 머물지 않고 지점을 냈다. 롯데백화점 노원점은 옛 미도파백화점 상계점으로,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미도파를 운영하던 대농그룹은 한때 국내 재계 순위 10위권에 들었던 재벌이었다. 대농은 1955년 박용학 창업주가 동업으로 창업한 농산물 업체 대한농산이 모태다. 1967년 고려원양어업과 대한선박을 설립한 후 면방직 사업에 뛰어들어 사세를 확장했다. 미도파백화점을 인수한 뒤 1972년에는 관악CC를 인수하고 해운업에 손대기도 했다. 1977년부터 대농은 창업투자회사, 케이블TV 산업 등을 인수하며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지만 무리한 차입경영으로 그룹 해체를 부르고 말았다. 1996년 10월 미도파가 신동방그룹에 팔렸고, 이듬해 4월 그룹이 완전히 해체됐다. 관악CC(현 리베라CC)는 2001년 박순석의 신안그룹으로 넘어갔다.

미도파는 그 전부터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백화점 업계에 진출한 롯데, 현대 등의 대재벌은 미도파와 화신의 시장을 빼앗았다. 미도파도 변신을 시도했지만 경쟁에서 밀렸다.
7층 규모의 영플라자와 더불어 옛 한일은행 본점 건물의 명품관 에비뉴엘을 거느리며 롯데는 남대문로 일대에 롯데타운을 건설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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