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같은 비오니에 와인.. 치명적인 메두사를 닮았을까, 가녀린 다프네가 떠오를까

      2024.02.22 07:00   수정 : 2024.02.22 07:15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얼마 전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와인 라벨에 강렬한 메두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와인을 꺼내들었습니다. 비뇨블 벨라스((Vignobles Vellas)가 프랑스 랑그독 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지방에서 비오니에 100%로 만드는 ‘메두사 비오니에(Medusa Viognier)’ 와인입니다. 동석자들은 비오니에 품종이 주는 우아한 향과 고급스런 맛보다는 라벨 속 메두사 그림에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비뇨블 벨라스 오너인 니콜라스 벨라스가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 맛은 굉장히 좋지만 그림 실력은 별로인 듯 합니다.


#1.누구나 다 아는 그림 속 주인공인 메두사는 그리스 신 고르고네스의 막내딸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다 아테네 여신의 분노를 삽니다. 아테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온통 뱀으로 변하게 만들고, 메두사는 나중에 프로세우스에게 머리가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못지않게 유명한, 혹은 더 유명할 수도 있는 메두사는 카라바조가 그린 ‘메두사(1597년, 60x55, 유채, 우피치미술관)’입니다. 페르세우스에게 목이 잘린 순간을 마치 옆에서 사진 찍듯 잡아낸 그림으로 튀어나올 듯 한 눈동자와 비스듬한 시선, 비명을 지르며 벌어진 입이 압권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두사의 부릅뜬 두 눈은 목이 잘린 고통보다는 자신의 지금 상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과 분노가 그대로 읽혀집니다. 비명을 지르는 일그러진 입과 잘려진 목에서 쏟아지는 붉은 피는 사건이 방금 일어난 것 같이 생생함을 더 합니다. 특히 메두사의 얼굴이 신화 속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남성의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더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입니다.

카라바조로 더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는 20대 중반에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러나 불같은 성격이 문제였습니다. 늘 음주와 도박에 빠져 지내고 툭하면 폭행에 연루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어 시라큐사, 시칠리아, 몰타 등을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고 연명하다 1610년 30대 후반 나이에 쓸쓸히 객사합니다.

이처럼 온갖 기행을 저질렀지만 카라바조는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너무도 유명한 ‘테네브리즘(명암법)’의 창시자이자, 르네상스를 완성하고 바로크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습니다. 테네브리즘은 그림의 배경을 암흑에 가깝게 처리한 후 주인공과 그 주변의 등장 인물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듯한 느낌을 줘 몰입도를 극대화 시키는 기법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속에서 성냥불을 그어대는 순간, 밝아지며 드러나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마치 카메라 셔터처럼 잡아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카라바조는 여기에 더해 그림 속 등장인물의 얼굴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나 노숙자, 창녀 등 하층민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종교화를 그릴 때도, 성인의 모습을 표현할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림 속 상황에 맞는 극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적 심리까지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진짜 극도의 몰입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늘 신성모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은 나중에 루벤스를 거쳐 렘브란트를 ‘위대한 빛의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바로 카라바조였습니다.


#2.“하하하. 그렇게 작은 활로 뭘 할 수 있다고..”거대한 뱀을 쏘아 죽인 궁술의 왕 아폴론이 작은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는 에로스를 얕잡아보며 약을 올렸다. 화가 난 에로스가 납화살을 꺼내 근처를 지나던 요정 다프네를 향해 쐈다. 그러고는 금화살을 꺼내들더니 아폴론을 향해 활시위를 놨다. 그러자 아폴론을 본 다프네는 황급히 도망가고 아폴론은 그 뒤를 쫒기 시작했다. 에로스가 쏜 납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증오하고, 금화살은 처음 본 이성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게 되는 화살이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에 닿기 직전 다프네가 다급하게 아버지인 강의 신에게 기도했다. "아버지, 땅을 열어 나를 숨겨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위험을 불러온 저의 몸을 변하게 하소서.” 순간 다프네의 머리카락이 월계수 잎으로 변하고, 아름답던 팔과 다리가 쩍쩍 갈라지며 나무껍질로 바뀌기 시작했다.

로마를 대표하는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이 장면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것처럼 찰나의 순간으로 잡아냈습니다. ‘아폴론과 다프네(1622~1625년, 243, 대리석, 보르게세미술관)’입니다. 아폴론의 손이 다프네 허리에 막 닿는 순간 기겁하는 다프네의 표정과 몸짓이 압권입니다. 너무 놀라 비명마저 지르지 못하는 듯 벌어진 입과 아폴론으로 향해 돌아간 눈에선 원망이 가득하고, 그의 손에서 떨어지려 휘어진 몸과 허우적대는 손가락 끝에서는 공포와 절규가 뚝뚝 묻어납니다.



우르바노 8세, 인노첸시오 10세까지 두 교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베르니니는 20년 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작품을 내놓습니다. ‘성녀 테레사의 환희(1647-1652, 대리석, 산타마리아 비토리아 성당)’로 예술사에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오른손에 황금화살을 들고 있는 천사가 성녀 테레사의 가슴쪽 옷깃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히고 심장에 화살을 꽂아넣으려는 모습의 작품입니다. 천사는 성녀의 가슴에 수차례 화살을 넣었다뺐다를 반복하고, 성녀는 누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을 벌리고 축 늘어져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묘한 미소를 띤 천사의 모습과 옷 속에서 벌어진 성녀의 두 다리와 맨발은 야릇한 상상력마저 불러옵니다.

“작은 천사가 내려오는 게 보였어요. 천사는 황금 창을 들고 있는데 창 끝에서는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는 그 창을 들어 내 심장을 여러 차례 찔렀고 그 순간 내 몸이 관통되는 듯 했어요. 그 고통은 너무나 강렬해서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고통만큼 내 몸은 신에 대한 위대한 사랑으로 맹렬히 타올랐고 그 격렬한 고통으로 얻은 희열은 잊고 싶지 않을 만큼 벅찼어요.”
이 작품은 에스파냐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2~1582년)가 자서전에서 천사가 신성한 사랑의 창으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환상을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찰나의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3. 1506년 1월14일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밭을 갈던 한 농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졌다. 땅을 파던 중 고통스런 얼굴을 한 남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는데 죽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티투스 황제 궁전에 있다가 1500년 동안 사라졌던 ‘라오콘 군상(BC 175~150, 205 x 158 x 105, 대리석, 바티칸미술관)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율리우스2세가 미켈란젤로를 발굴 현장에 보냈는데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품을 본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조각 중앙에서 온 몸을 뒤틀고 있는 남자는 트로이 신관 라오콘이고 양쪽 두 아이는 그의 아들입니다. 왼쪽 아이는 이미 뱀에 물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고, 오른쪽 아이는 뱀에 휘감겨 꼼짝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때 바다뱀 한 마리가 라오콘의 옆구리를 덥석 물어버립니다. 순간 라오콘의 몸이 고통에 뒤틀리고 얼굴은 하늘을 향해 몸부림칩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입과 일그러진 얼굴에서 고통보다는 탄식과 허무함이 더 느껴집니다.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은 어쩌다 이같은 고통에 처해졌을까요. 트로이 전쟁에서 성문을 열지 못한 그리스연합군은 커다란 목마를 남기고 그리스로 철수합니다. 당시 사제이던 라오콘은 그리스 군의 음모를 간파하고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다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아들들을 물어죽이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그리스 시대 로도스 섬의 예술가 아게산드로스, 플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 세 명이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걸작입니다.

그런데 라오콘 군상이 발견됐을 때 라오콘의 오른쪽 팔이 없었습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당대 예술가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입니다. 1500년 동안 본 적이 없어 사라진 팔이 어떤 모습일지 주장이 다 달랐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몸의 형태와 근육을 볼 때 팔이 굽어져 있을 것이라 했지만 다른 예술가들은 쭉 뻗어있을 것이라 추정했습니다. 결국 쭉 뻗은 상태의 팔로 복원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1905년 본체가 발견됐던 근처에서 부러진 팔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됩니다. 라오콘 군상에 맞춰보니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그 팔은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지금 바티칸 벨베데레 정원에 있는 모습입니다.


#4.다시 돌아와 비뇨블 벨라 메두사 비오니에 와인을 엽니다. 비오니에는 프랑스 론 지역 화이트 품종입니다. 흰꽃과 약간의 장미꽃이 섞인 정말 화려한 향을 뿜어내며 살구, 복숭아 등 핵과류 과일향도 이 품종의 특징입니다. 산도는 미디엄이나 그 이하로 묵직하지만 우아한 맛과 향으로 향수같은 와인으로 표현됩니다.

잔을 가까이 하면 역시 절제된 유질감 있는 꽃향이 먼저 반깁니다. 중간중간 산뜻하고 관능적인 장미향도 들어옵니다. 과실향은 많지 않습니다. 입에 흘려보면 그제서야 알맞게 익은 복숭아, 살구 등의 아로마가 얹혀집니다.
산도는 굉장이 절제돼 있어 와인이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과실 아로마도 열대과일 등은 없습니다.
비오니에는 본고장인 론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언제나 한결같은 고급스런 향수의 모습을 보입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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