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쿠바 수교와 한류의 힘

      2024.03.19 18:11   수정 : 2024.03.19 18:11기사원문
한국과 중남미 공산국가 쿠바의 수교가 부른 나비효과일까. 올해 3월에 쿠바 예술대학(ISA)에 한국어 강좌가 신설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달 양국 간 극적 수교 발표 이후 지구 반대편 카리브해 섬나라에서 한류 확산 기운이 이처럼 완연하다.

쿠바가 한국의 193번째 수교국이 됐다는 건 엄청난 함의를 지닌다.

수교국 한 나라를 더하는 차원 이상이다.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혁명에 성공한 뒤 1960년 북한과 국교를 맺고 한국과 교류를 끊었다.
이후 카스트로는 반미를 코드로 김일성 주석과 죽이 잘 맞았다. 소련·중국이 참가한 1988년 서울올림픽도 북한과의 의리를 들어 보이콧할 만큼. 1980년대 개혁·개방을 택한 소련은 쿠바의 무기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카스트로에게 AK소총 10만정 등을 무상 지원했다.

그래서 김정은 정권으로선 '형제국' 쿠바의 변심은 충격이었을 법하다. 한·쿠바 수교 발표 다음 날 그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북·일 관계 개선 여지를 거론했다. 일본인 납치와 북핵 문제를 거론 말라는 전제조건과 함께 "기시다 총리의 평양 방문도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라기보다 서울 주재 쿠바대사관 개설이 임박한 데 따른 초조감이 잔뜩 묻어나는 대목이다.

탈냉전과 함께 노태우 정부는 사회주의권을 상대로 북방외교를 추진했다. 1989년 헝가리와의 수교가 첫발이었다. 그 성과를 토대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를 노크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도 같은 기조였고, 박근혜 정부는 더 적극적이었다. 유독 김정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던 문재인 정부만 소극적이었을 뿐이다. 한·쿠바 수교는 윤석열 정부 들어 성사됐지만, 북방외교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쿠바는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기 전 사탕수수 수출과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였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럼주와 설탕을 뒤섞은 칵테일 모히토를 즐겨 마셨던 데서 보듯이. 그는 쿠바 수도 아바나에 오래 체류하면서 '노인과 바다' 등을 썼다.

52년 집권한 카스트로 정권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았지만, 북한 3대 세습정권처럼 막무가내로 쇄국을 택하진 않았다. 정치·군사적으론 북과 손잡았지만, 2005년 현대중공업의 진출을 반기는 등 한국에 경제 빗장을 열었다. 10페소짜리 지폐에 현대중공업이 수출한 이동식 발전설비 도안을 집어넣었을 만큼.

물론 피델과 라울 등 카스트로 형제가 물러난 이후에도 쿠바의 경제난은 지속됐다. 하지만 곤궁하기론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무기를 팔아 연명하는 북한이 몇 배 더할 것이다. 그러니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현 쿠바 정부가 더는 북한의 심기를 살필 계제가 아니라고 보고 한국에 다가온 것이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가 말한 '소프트 파워'는 한·쿠바 수교의 숨은 동인이었다. 소프트 파워는 쉽게 말해 타국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양국 간 문화·관광 교류가 북한의 견제를 넘어 양국 수교에 불을 댕긴 기폭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연간 약 1만4000명의 한국 관광객이 쿠바를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등이 지구촌 아이돌로 부상하면서 쿠바 내 최대 한류 커뮤니티 아르코르의 회원 수가 1만명을 넘었다.

결국 쿠바 경제에 도움이 되는 한국 관광객 증가와 한류 확산이 선순환하면서 양국 간 이념장벽을 허문 격이다.
나이 교수가 "1989년 베를린장벽이 포화가 아니라 서구 문화와 방송에 노출됨으로써 변화된 (동독)사람들의 마음이 휘두른 망치와 불도저에 무너졌다"고 갈파한 그대로. 앞으로 K컬처의 놀라운 힘이 핵무장으로 '글로벌 왕따'를 자초하고 있는 북한마저 개혁·개방의 대도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kby777@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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