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

      2024.03.22 04:00   수정 : 2024.03.22 04:00기사원문

"‘풍경’은 내 마음과 머릿속을 완전히 비운 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상태가 내 마음과 눈에 투영돼 그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됐을 때를 의미합니다."(김민정 작가)

현실에서 마주한 풍경부터 상상 속 풍경까지 폭넓게 아울러 '자연'과 '인간'의 융화라는 관점에서 풍경을 재해석한 기획전이 국내 처음으로 선보인다. 풍경화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게 이번 기획전의 핵심이다.



갤러리현대는 내달 14일까지 김민정(62), 도윤희(63), 정주영(55) 등 세 작가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주요 작품을 전시한다. 소속 작가들의 과거 작품을 되돌아보고(Revisit), 현재 관점에서 재조명(Re-evaluate)해보는 '에디션 R' 프로젝트 일환이다.


자연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형상화한 김민정 작가, 내면의 풍경을 담은 도윤희 작가, 풍경화라는 개념에 도전하는 정주영 작가의 작품이 형성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한지를 작품의 주재료로 삼는 김 작가는 먹과 수채 물감의 관계, 얼룩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한 일련의 수묵 채색 추상 등 1990년대 작품을 소개했다.

그의 2000년대 작품에서는 작품의 일부를 불로 태워 그을림을 번지게 하거나 타고 남은 조각을 섬세하게 배열해 추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한 특징이 있다.


이 같은 유형의 대표작으로 전시관 2층에 걸린 '문 인 더 선(Moon in the sun)'이 있다. 이 작품은 파괴의 의미인 불을 다스려 풍경을 다양하게 해석하게 했다. 실제로 먹과 그을림 및 번짐이 조화롭게 어울려 떨어져 있는 이질감이 없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다는 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생각과 마음의 '비움'에 대한 깨달음을 담은 불교적 관점의 풍경을 선보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또다른 대표작 '프리마베라(Primavera)'는 태움의 미학이 아닌, 먹과 코발트 블루를 연상케 하는 수채화 색으로만 조화를 이루게 해 비움의 풍경을 완성했다.

1세대 서양화가이자 정물화 대가인 도상봉 화백(1902~1977)의 손녀이기도 한 도 작가는 이번 기획전을 통해 흑연 드로잉 위에 바니쉬(광택이 있는 투명 피막을 형성하는 도료)를 반복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주로 내놨다. 이를 통해 부유하는 세포들이나 화석의 단면, 수증기의 움직임처럼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자연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시각화했다. 전시관 1층 정면에 위치한 대표작 '밤은 낮을 지운다'는 흑연 드로잉으로 바탕을 번지게 해 밤을 연상케 했으며, 나머지 흰 부분인 낮이 밤에 덮이는 모양새다.

현미경으로 봐야만 보이는 세포들을 재해석해 그린 'Being'은 알알이 박혀 있는 세포들의 몽환적 느낌을 표현했다. 도 작가는 "내 작업은 세상과 현상, 사건 등 표면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산의 작가'로 불리는 정 작가는 1990년대 작품에서 김홍도와 정선의 회화 일부를 확대해 대형 캔버스에 그렸다.

원본과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또다른 회화적 공간'으로 구축하고, 진경과 실경, 관념과 실재, 추상과 구상 사이에 놓인 이중적인 '틈'을 파고든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계기가 됐다.
대표작 '인왕제색'은 이 같은 취지를 십분 살리고 있다. 정선이 비 내린 뒤의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의 일부를 확대해 애초 실제가 아닌 '진경'을 또 다른 '진경산수화'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민수 갤러리현대 큐레이터는 "이번 기획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인 이들이 20~40대에 치열하게 작업한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며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적 풍경이 아니라 그 너머의 어떤 심미적인 풍경, 직관적인 풍경, 풍경을 가지고 회화적 도전을 했던 풍경까지 다양한 작업들을 선보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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