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바이블 '정석’

      2024.03.28 18:06   수정 : 2024.03.28 18:06기사원문
'수학의 정석'을 흔히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한다. 누적 판매량이 5000만권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고교 수학의 '바이블'을 상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으로 수학 공부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석(定石)'은 바둑 용어로 '최선으로 굳어진 일정한 수순'을 뜻한다.

정석 시리즈의 첫 저작으로 '수학Ⅰ의 정석'이 나온 것은 1966년 8월 31일. 올해 발행 58주년을 맞는다.
첫 신문광고가 다음 달에 실렸는데 그때 벌써 46판이라고 씌어 있다. 발간 첫해 넉달 동안에만 3만5000권이 팔렸고 이후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 매년 평균 100만권으로 뛰었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한해에 150만~180만권씩 판매됐다. 엄마의 얼굴을 넣은 광고도 실었다(동아일보 1999년 1월 21일자·사진).

5000만권은 어느 정도일까. 반지의 제왕 180만권, 토지 360만권, 태백산맥 700만권을 압도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세계 역대 도서 판매량 36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성경이나 '마오쩌둥 어록'과 같은 특별한 용도가 있는 도서들이 상위에 있다. 광고에 보면 최초로 나온 수학Ⅰ의 정석은 600쪽에 350원, 출판사는 '수험사'로 돼 있다.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저자인 홍성대 전 상산학원 이사장이 1972년 성지출판사를 차려 발행하고 있다.

홍 전 이사장은 전북 정읍 태인면 출생이다.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을 겪었다고 한다. 익산 남성고에 진학했는데 태인에서 신태인까지 8㎞를 자전거로 가서 신태인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익산까지 통학했다고 한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는 자취하는 친구 신세를 지거나 가정교사를 하며 고교를 졸업했다.

서울대 수학과에 57학번으로 입학해서는 생활비를 벌려고 과외를 하고 재학 시절부터 학원 강사로 일했다. 그때부터 '족집게 강사'로 이름을 날렸는데, 자신의 교재를 만들고자 집필한 끝에 나온 책이 수학의 정석이다. 광화문의 외국도서점을 뒤지는 등 외국 자료도 모아 참고했다. 1963년에 쓰기 시작한 책은 3년 만에 완성됐다. 29세, 20대 때였다. 외국 책을 베꼈다는 항간의 주장에 대해 홍 전 이사장은 "외국 책하고 내 책을 비교해서 한 페이지라도 같은 것 있으면 가져와라. 내가 포상을 해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석 한권 값을 평균 1만원으로 어림잡으면 누적 판매액이 5000억원, 5000원이라면 2500억원이다. 웬만한 중소기업 매출을 능가하는 금액이다. 홍 전 이사장은 벌어들인 큰돈을 다른 사업에 투자하지 않고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했다. 1981년에 전주 상산고교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산은 홍 전 이사장의 호다. 지금 가치로 가히 1000억원은 투입됐을 것이라고 한다. 6만㎡가 넘는 부지에 난방장치와 샤워장 등 현대식 시설도 갖추었다. 모교인 서울대 총동창회 부회장을 맡으며 40억원을 들여 상산수리과학관을 지어 기부했고 다액의 장학금도 냈다. 자율고인 상산고는 올해 서울대에 전국 5위권인 36명을 합격시켰다. 의·치·약학계열에도 해마다 220여명의 합격자를 내는 명문고가 됐다. 고향 정읍에는 '수학정석길'이라는 길이 생겼다.

입시 제도와 학습법의 변화로 영어 참고서계의 정석과도 같았던 '성문종합영어'가 옛 명성을 잃었듯이 수학의 정석도 예전만큼 팔리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해마다 개정판을 내 수험생들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홍 전 이사장의 가족은 모두 서울대 수학과 동문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수학과를 졸업한 아들 홍상욱 성지출판사 대표는 2021년 상산학원 이사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딸 홍재현 서울대 수학과 교수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사위 이창형씨도 동문이다.
딸과 사위는 교육과정이 개편될 때마다 홍 전 이사장을 도와 책 개정 작업에 참여해 왔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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