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뇽 블랑이 살짝 메이크업을..'크레기 레인지' 정말 우아하네
2024.05.13 05:51
수정 : 2024.05.13 08:25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향후 1000년 동안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취득하지 못하게 한 와이너리가 ‘비밀스런 장소’에서 만드는 와인은 어떤 맛일까.
얼마 전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을 가장 맛있게 만드는 나라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그런 소비뇽 블랑을 경험했다. 1998년 혹스베이에서 와인사업을 시작한 신생 와이너리임에도 고품질 와인으로 정평 난 ‘크레기 레인지(Craggy Range)’의 ‘테 무나(Te Muna)’다.
크레기 레인지는 1993년 사업으로 큰 성공을 이룬 창업자 테리 피바디(Terry Peabody)와 그의 아내가 최고의 땅에서 최고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땅을 찾아 나선 끝에 1997년 뉴질랜드에 세운 와이너리다.
피바디는 이 와이너리가 다른 사람에게 팔리지 않고 후대 가족에게 소유가 이어지도록 ‘1000년간 판매하지 않겠다’는 법적 신탁까지 받았다.
크레기 레인지의 ‘크레기 레인지 마틴보로 테 무나 2023(Craggy Range Martinborough Te Muna 2023)’을 열어봤다. 소비뇽 블랑 100%의 와인으로 테 무나는 ‘비밀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잔에 따라진 와인은 아주 투명하고 반짝거린다. 볏집색이 살짝 비칠 정도로 거의 색이 없다. 잔에서 올라오는 향은 기분좋은 잔디향과 말린 꽃향이 먼저 느껴진다. 꽃향도 흰색보다는 가벼운 붉은색 계열이다. 이어 약간 덜익은 패션푸르츠 향도 진하게 올라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향이 굉장히 강해진다. 마치 향수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진하다.
입에 넣어보면 좋은 산도가 들어와서 서서히 치솟는다. 산도는 미디엄플러스 수준이지만 날카로움이 없이 굉장히 미끈한 산도가 우아하다. 단맛이 하나도 없는데 살집이 제법 느껴지고 우아한 느낌이 든다. 프랑스 론(Rhone)지역의 마르산(Marsanne), 루싼(Rousanne)의 향과 질감이 있다. 소비뇽 블랑은 절대 자신을 숨기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품종이다. 어느 곳, 어느 기후에서도 늘 같은 맛이 나는데 이 와인은 “어, 블렌딩인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데 다른 점이 또 있다. 차근차근 음미하지 않아도 확 느껴지는 청량함이다. 탄산이 없는데도 스파클링의 청량함이 느껴지다니.. 진짜 독특하고 맛있는 와인이다.
크레기 레인지의 피노 누아(Pinot Noir)도 상당히 수준급이다. ‘크레기 레인지 싱글빈야드 피노 누아’는 잘 말린 장미향이 일품이다. 무겁지 않은 질감에 스모키한 타닌과 좋은 산도는 뉴질랜드의 전형적인 피노 누아와는 분명히 다르다. 미국 오레곤의 피노 누아보다는 확실히 프랑스 부르고뉴 쪽에 더 가깝다. 좋은 포도와 와인 메이커의 출중한 실력이 느껴지는 굉장히 뛰어난 품질을 확인할 수 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