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서 깜빡 졸았을뿐인데..주점에서 3500만원 결제, 눈 떠보니 부산
2024.06.05 15:30
수정 : 2024.06.05 15:3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지난 5월 2일. 30대 직장인 김모씨의 하루가 악몽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날 서울 왕십리역에서 20년지기 친구와 저녁 술자리를 가진 후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손님이 모두 결제하셨잖아요"
김씨가 금융앱 토스를 이용해 열어본 본인 계좌에는 기억이 지워진 시간대인 5월 2~3일 이틀간 10여차례 계좌이체가 실행됐다. 특히 5월 3일 새벽 5시부터 오전 8시 사이에 Y모씨 앞으로 거액이 빠져나갔다. 새벽 4시 59분과 5시 정각엔 각각 80만원과 210만원이 빠져나갔다. 그 뒤엔 거액의 카드론 대출이 실행됐다. 8시 28분에는 카드론 신청 금액 1000만원이 들어왔고, 1분 후 그 돈이 고스란히 Y씨 계좌로 흘러갔다. 8시 30분엔 다시 1800만원의 카드론이 실행됐고, 5분 지난 8시 35분에 각각 1000만원과 800만원으로 나뉘어 Y씨 계좌로 직행했다. 1회 이체 금액이 제한이 걸려 있어 이체에 시간이 걸린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는 A 유흥주점과 연락이 닿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당시 A 유흥주점 측 종업원은 "형님(손님)이 즐겁게 잘 드시고 결제 하셨다"고 답했다. 김씨가 "나 혼자 술을 마시고 3500만원을 결제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지만 A 주점 측은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김씨가 "카드론으로 결제한 금액이라도 돌려주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하자 A 유흥주점은 "형님이 하신 증거가 있다"며 영상 파일을 김씨의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영상 속 김씨는 주점에서 계속 결제 서류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남자 종업원이 "영수증이에요 영수증"이라며 각서 형태의 문서에 사인을 요구하자 영상 속 김씨는 아무 말 없이 펜을 들어 서명했다. "형님, 결제 금액 다 확인하신거죠"라고 직원이 묻자 김씨는 "예"라고 서류에 지장까지 찍었다.
"최면 걸린 것 같아..."강남서에 고소장 접수
김씨는 영상을 볼 수록 의구심이 커졌다고 한다. A주점 측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찍은 영상이다. 다만 영상 속 김씨는 거의 말이 없고, 표정도 좋지 않았다. 김씨는 파이낸셜뉴스측에 "최면에 걸리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을 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김씨는 "A 유흥업소측이 '물뽕(GHB)'을 술에 탄 것으로 보인다"고 의심했다. 지난달 4일 자택 인근 병원에 방문해 마약 검사를 받았다. 그는 "그날 내가 결제하는 영상이 찍힌 상황이 너무 의도적이라는 의심이 들었다"면서 "몸에서 무언가라도 나와야 범죄 피해를 제대로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병원의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씨는 자신의 몸에서 마약 투약 흔적은 확인하지 못했다.
5월 4일 오후 2시.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강남경찰서에 방문해 고소장을 접수했다. 본지 취재에 따르면 강남 경찰서에 이 사건은 '준사기' 혐의로 접수된 상태다. 법조계에선 이미 유사 처벌 판례가 많아 적절한 증거가 확보되면 처벌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의 한 유흥주점 업주 김모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김씨는 지난 2014년 7월에 웨이터 등과 공모해 취객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한 후 이른바 '삥술(가짜 양주)'로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손님이 마시지도 않은 술을 테이블에 올린 후 바가지 술값을 받아냈으나 기소돼 지난 2019년 11월 서울 동부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술집 전무로 일한 최모씨와 지배인 김모씨는 각각 징역 4년에 처해진 바 있다.
"검출은 안되고, 타인 조종 가능"
다만 업소측이 물뽕(GHB)을 이용했는지 여부는 입증 가능성이 희박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의견이다. GHB가 체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극히 짧기 때문이다.
박진실 법무법인 진실 변호사는 "필로폰은 사람 몸에 오래 남지만 물뽕(GHB)은 몸에서 쉽게 빠져나가므로 즉시 진단을 해보지 않는 이상 범죄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면서 "물뽕을 섭취해도 호흡곤란 등이 오지만 신체에 이상증상 조차 발현되지 않는 사례가 다수 있고, 투약시 피투약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물뽕을 당했다면 자신도 모른 채 어떠한 계약 문서에 서명하는 등 타인에 의해 조정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초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출신 정희선 성균관대학교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는 "물뽕은 약물이 체내에 머무는 시간이 하루도 가지 않아 정밀 검사로도 검증이 상당히 어렵다"고 전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유흥업소에서 손님을 바가지 씌우는 범행은 대부분 1인 취객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면서 "상습 범행을 저지르는 업소도 2인 이상의 손님에게는 범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정상영업을 한다"고 전했다.
hsg@fnnews.com 한승곤 김동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