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독재와 민주주의의 붕괴
2024.06.05 19:30
수정 : 2024.06.05 21:06기사원문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는 법의 지배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념이다. 법이라는 형식을 빌려 권력자가 정치나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동서고금에서 벌어졌다. 외양만 법을 빌렸지 사실은 법치 아닌 인치(人治)다. 히틀러의 전체주의도 실은 겉으로는 법이라는 허울을 썼다.
주지하다시피 스티븐 레비츠키 등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도 선출된 권력이 형식적 민주주의로 사실상의 독재를 행하는 민주주의라는 좋은 이념의 배반을 다룬 것이다. 남미의 개도국만이 아니라 미국조차도 대중 선동으로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 가사다"라고 한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최종적 신뢰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제 막 기틀이 잡힌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처럼 보이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입법부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다수의석이란 든든한 뒷배를 소유한 야당의 이른바 입법독재다. 다수는 곧 정의라는 자기확신은 이제 막 닻을 올린 22대 국회에서 더 강력해졌다. 권력을 통제하는 수단이어야 할 법이 곧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버린 희한한 상황이다.
'법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를 야당이 주도권을 쥔 국회가 민주주의란 미명(美名)으로 포장해 자행하는 중이다. 근자에만 복수의 대통령 탄핵을 실행했거나 시도한 바 있는 경험은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대통령도 탄핵한 마당에 거대한 탄핵에 비하면 특검은 작은 방편에 불과하다. 준사법기관인 검찰쯤은 신중한 고려대상이 이미 아니다. 삼권분립은 한쪽의 다리가 너무 길어 기울어진 분립일 뿐이다.
관용과 자제, 자기통제를 기대할 수 없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장래가 더 위험하다. 상대를 인정하기보다는 갖은 합법적 도구로 압박하며 적대시하는 강도를 높이는 목적은 물론 권력 쟁취다. 권력을 손에 쥐어 맛을 느껴보고, 또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체감한 자일수록 욕구는 더 강해진다. 그들의 눈에 민생이 먼저 띄기 어렵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지역민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한다. 정책을 꼼꼼히 살펴서 질의하고 따진다. 그러면서 받는 보수는 일반 회사원 수준. 어떤 권위도 찾아볼 수 없다. 딴 세상 이야기 같은 선진국 의원들 모습이다. 유권자들에게 90도로 허리를 꺾던 우리의 후보자들은 금배지를 달자마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고급 관용차를 타고 다니며 권위를 만끽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백성에게는 안하무인인 정치 투사로 복귀하고 있다.
진실하고 따뜻한 의정을 마주하기 힘든 배경에는 불행한 역사가 있다. '동물 국회'로서는 우리와 동일한 대만이 그런 것처럼 극단적 이념대립이란 무거운 굴레를 우리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희귀한 괴물 같은 북한을 머리에 이고서도 단합과 협력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은 정치의 해독이랄 수밖에 없다. 작은 갈등을 화합으로 치유하기는커녕 도리어 정치는 오디오의 앰프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그러니까 이념은 곧 정치의 목적이자 수단인 셈이다. 권력 획득을 향한.
바른 정치의 1차 책임은 대통령과 행정부에 있겠지만, 입법부의 책임도 못지않게 무겁다. 국회의 정치 과잉은 과잉의 특권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 톱3라는 1억5700만원의 세비만이 아니다. 불체포특권도 내려놓아야 하고 이발비와 약값까지 세금으로 쓰는 그릇됨도 고쳐야 한다.
그다음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다. 행정부 견제라는 범주를 넘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질주를 중단할 때까지. 그래도 국회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믿음을 국민은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