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부산을 들어올리다
2024.07.01 16:27
수정 : 2024.07.01 16:27기사원문
부산 영도(影島)는 영도다리, 태종대, 봉래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적은 14.13㎢이며 2000년 13.95㎢에서 매립으로 0.18㎢ 늘어났다. 인구는 2024년 현재 10만6108명으로 2013년 13만5816명 이후 꾸준히 줄었다.
영도라는 지명의 어원은 절영도(絶影島)다. 명마들이 빨라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는 거의 절영(絶影), 절영도(絶影島)로 나온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마장이 있어서 목도(牧島), 목지도(牧之島)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영도로 부르면서 그림자 섬이 되었다. 1960년경 부산 해도에 봉래산이 목도산(牧嶋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도가 목도(牧嶋)로도 불린 것이다.
모두 목마장과 연관된다. 영도 목마장 기록은 신라 성덕왕과 김유신 장군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당시 조정과 진골 귀족들이 마장을 운영했다. 명마는 군사와 운송 용도는 물론, 귀족의 자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영도를 제주 말의 임시 거처로 삼고, 군사 훈련에 임했다.
영도의 지형은 내륙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봉래산(395m), 남쪽 동삼동의 진후산(150m), 그리고 태종대 해안의 태종산(252m) 등 3체의 산지가 주축을 이룬다. 해안에서는 해식애, 간석지와 평야, 자갈해안 등이 펼쳐진다. 섬의 북쪽은 완만해 부산 도심과 연계되면서 도시화가 잘 되어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산지와 식생이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영도는 남서-북동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부산항의 천연의 방파제 기능을 한다. 그 징표로 영도의 서부해안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해식애와 좁은 자갈 해안들이 발달해 있다.
영도는 중심지에 인접한 주요 주거지가 되었다. 항만 해안가에는 조선업, 선박수리와 장비 관련 산업체가 집중했다. 항만 관련 창고업도 성행했다. 해방 되면서 부산 인구는 급격히 증가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 해방과 6·25전쟁으로 북한 사람들의 남하의 영향이 컸다. 급격한 인구와 인구 밀도 증가로 부산에는 큰 화재가 많았다. 부산이 아니라 불산이라 했고 이름에 가마솥(釜)이 있어 그런가 우스개 말들을 했다.
유명한 사건들로 국제시장 화재(1953년 1월), 부산역전앞 화재(1953년 11월), 그리고 용두산, 영주동 피난민촌 화재(1953년 12월) 등이 있다. 영도는 피난민과 화재 재난민들의 입주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많은 경남인들이 부산으로 모였다. 부산은 산업과 학업의 중심지였다. 1960년대 부산은 선박과 해양, 그리고 합판, 신발 산업 등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많은 부산 사람들이 어업과 해운업에 종사했다. 한국 조선공업은 부산이 기원이다.
1930년대 조선중공업과 해방 이후 대한조선공사가 이를 주도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북양 명태나 남양 참치잡이 등으로 원양업 종사자도 많았다. 영도는 이를 위한 공단과 주거지를 제공했다.
해양수산 사업이 많은 부산은 안전을 하늘과 신선에 기원할 일이 많았다. 특히 영도의 동이름에 신선사상(神仙思想)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봉래동(蓬萊洞), 신선동(神仙洞), 영선동(瀛仙洞), 청학동(靑鶴洞)이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대평동(大平洞), 남항동(南港洞), 대교동(大橋洞)은 개항 이후 간척과 매립, 항만건설, 영도대교 설립에서 유래하는, 현대화를 상징하는 동명들이다.
영도는 신선사상과 현대화가 대조적으로 지명에 반영되어 있다. 동삼동(東三洞)은 섬 동쪽에 상리, 중리, 하리 등 세 마을이 있다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동삼동은 영도 면적의 57%, 인구의 40%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다. 중리 지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영도의 인구와 시설이 밀집하면서 도심에서 멀어 상대적으로 자연지형과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동삼동이 도시화된다. 교육시설만 보아도 초등학교 6개, 중학교 3개, 고교 5개, 대학 캠퍼스 3개가 자리잡았다. 동삼동은 교육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봉래산은 영도에서 중심적 지형 요소다. 봉래산의 산신 ‘고갈 할매’는 영도 주민들의 바닷가 안전과 살림살이 등을 보살핀다는 것이다. 봉래산을 중심으로 복천사를 비롯해 약 30여개의 사찰들이 밀집해 있다. 2013년 자료를 보면 부산에 대략 500명의 해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150명이 영도에 살았다.
영도의 영선동과 동삼동에서 태종대에 이르는 바닷가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채취해왔다. 더러는 영도를 작은 제주라고 했다. 바다 건너 해수욕장이 있는 송도에서 바라보는 영도 해안길을 제2송도, 즉 이송도(二松島)라 불렀다. 여기서 해녀들의 물길질과 해변 노상판매가 이루어졌다. 영도 해녀촌과 해녀문화전시관이 그 역사를 기념한다.
부산 영도에는 해운과 수산에 관련된 대학교, 연구소, 연구원, 박물관 등이 몰려있다. 한국해양연구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국립해양조사원, 한국해양수산연구원,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해양환경교육원, 국립해양박물관, 해녀문화전시관, 국립수산물품질관리원, 한국해양대학교, 부산해사고등학교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선 영조시대 문신 조엄은 1764년 대마도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영도에서 최초 재배했다. 고구마 재배가 성공해 전국으로 확대되고 쌀, 보리, 감자와 함께 주작물로 자리잡았다. 영도의 고구마를 조엄과 연관해 조내기 고구마라 하고, 조내기 마을도 있었다. 근래 조내기고구마 역사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부산은 임진왜란의 시작지였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가덕도 응봉의 연대봉(煙臺峰)에서 왜군들의 부산포 접근을 최초로 발견하고 보고했다. 부산 첨사 정발도 13일 오후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면서 왜선들을 발견했다. 조공선으로 알고 느긋하다가 왜선의 조총소리에 놀라 대피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지문에 1592년 4월 15일 왜선 90여척이 절영도 해안에 정박했다고 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서는 왜선 350척이 이미 절영도 건너 부산포에 정박했다는 것이다. 4월 16일 원균은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영도의 최고 명승지는 역시 태종대라 하겠다. 남해안과 대마도가 보인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다녀간 곳이다. 해식애 절벽, 해안단구, 그리고 파랑과 남해안 전망이 빛난다. 해식애에는 자살바위로 불리는 곳도 있다. 인근에는 인명을 구한다는 사찰 구명사(求命寺) 가 있다. 태종대 외에도 봉래산, 송남사 등 영도의 많은 곳에서 바다와 해안을 전망할 수 있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