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를 괴롭힌 어깨 통증은 바로 〇〇〇이었다

      2024.07.06 06:00   수정 : 2024.07.06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1737년 음력 2월 14일(영조 13년), 영조는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침전에서 용포를 입으려고 했다. 궁녀들이 용포 자락을 들고 있었고 팔을 올려 손을 넣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에 담이 결리듯이 통증이 나타났다.



영조의 어깨 통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저에 있었을 때부터 어깨가 간간이 아팠다.
즉위년에도 그랬고 망건도 간신히 쓸 정도로 통증이 나타났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관혈에 침을 맞아서 진정이 되었는데, 다시 재발한 것이다.

수의(首醫) 권성징은 “이것을 담(痰)의 일종으로 침보다는 뜸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자, 영조는 “예전에 중완혈에 뜸을 뜬 적이 있는데, 흉터가 남아 매번 어루만질 때마다 후회스럽다. 따라서 흉터가 없는 침을 맞고 싶다.”라고 했다.

영조는 4년 전에 아랫배가 뭉치는 증상으로 윗배의 중완혈에 직접구를 200장이나 뜬 적이 있었다. 그때 살을 태우는 뜸 때문에 배에 흉터가 남은 것이다. 영조는 그때부터 뜸을 극구 꺼렸다.

의관 현기붕이 침을 맞기 전이라도 우선 황랍병(黃蠟餠)을 만들어 붙일 것을 권했다. 황랍병은 밀랍을 녹여서 남성가루를 섞어서 따뜻하게 찜질을 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의관들은 돌아가며 천초수(川椒水, 제피열매 달인 물) 습포, 잠사(蠶沙, 누에똥) 찜질, 솔잎 찜질을 권했다. 영조는 이 중에 황랍병 찜질을 해보자고 했다. 황랍병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며칠 후 우의정 김흥경이 “담증(痰症)은 따뜻할수록 풀어지고 추울수록 뭉칩니다. 반드시 따뜻하게 한 뒤에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영조는 뜨거운 기운의 약재인 상륙(商陸)을 편썰어 그 위에 간접구로 뜸을 뜨고, 그 다음에 설면자(雪綿子, 풀솜)를 붙여서 환부를 따뜻하게 했다. 그러나 영조의 어깨 통증은 여전했다.

침의는 어깨의 견우혈과 팔꿈치의 곡지혈, 팔목의 내관혈에 침을 놓았다. 상륙을 이용한 간접구 뜸치료도 반복했다. 그러나 크게 차도가 없었다. 의관들은 기혈순환을 소통시키는 처방을 올렸다. 영조의 증상은 좋아지지도 심해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관들은 계속해서 뜸을 떠야 한다고 영조를 설득했다.

음력 4월 18일, 영조는 법강(法講)을 위해서 용상에 올랐다. 그런데 어좌에 오르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서 왼손으로 책상을 짚고 말았다. 영조는 “아악~~!!!” 하면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신하들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영조는 문제가 있는 왼쪽 팔에 또다시 큰 충격을 받았고 어깻죽지가 욱신거리고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강좌를 할 때 팔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용상 걸개에 올려 두었는데, 이조차 불편했다. 법강이 모두 끝날 때 즈음에야 욱신거린 증상이 진정이 되었다. 어깨의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음력 4월 21일, 영조는 팔을 올릴 수도 없었고, 뒤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포를 입고 벗는 것, 망건을 쓰고 벗는 것을 모두 내시와 궁녀의 도움을 받았다. 영조는 통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팔을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했고 어깨관절은 점차 굳어갔다.

의관들은 아시혈(阿是穴)에 뜸을 뜨고자 했다. 의관들이 가장 아픈 부위를 찾아서 그곳에 직접구로 뜸을 떴다. 직접구를 살을 태우는 뜸이다.

영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가 평소 살갗을 약쑥으로 태우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부득이하여 뜸을 뜨는 것이다.”라고 했다.

직접구는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뜸자리에 또다시 창(瘡)이 생겼다. 뜸을 뜬 자리 주위에 붉은 좁쌀같이 나와 퍼져 있었다. 과거의 중완혈 뜸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크게 차도는 없었다.

의관 권성징은 “어깨와 팔의 경우혈과 곡지혈에 다시 뜸을 뜨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뜸을 뜨는 것이 어렵다면 침을 맞아도 무방합니다.”라고 하자, 영조는 “얼마 전에는 아시혈에 뜸을 뜨면 나을 것이라고 했는데, 뜸을 떠도 효과가 없더니 이제는 다른 혈자리에 뜸을 뜨는 것이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자연히 낫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라고 거절했다.

의관은 뭐라도 해야 해서 솜으로 반팔을 만들어 초피(貂皮, 족제비 가죽)를 붙여서 어깨 환부를 감쌌다. 일종의 온열치료법이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뜸을 뜬 곳에 생긴 창구(瘡口)에서 고름이 흘러내렸다. 심지어 영조의 얼굴에는 뾰루지가 올라왔다. 처음에는 맑은 진물이 흐르더니 점차 탁해졌다. 간혹 핏기도 보였다. 어깨의 찌르는 듯한 통증은 줄었으나 조금 가려웠다. 의관들은 태을고(太乙膏)를 만들어 올리고 서경탕(舒經湯)과 육군자탕(六君子湯)을 합방해서 지어 올렸다.

음력 5월 말경, 의관들은 다시 뜸을 뜨기를 청했다.

영조는 “침도 효과가 없고 탕약도 효과가 없다. 뜸을 또다시 뜬다고 효과가 있겠는가? 지금은 잠시 중지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영조는 어깨의 통증이 낫지 않아서 치료에 대한 희망을 잃어갔다.

의관들은 “침과 뜸은 중지하더라도 처방은 복용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통초탕(通草湯)과 활담탕(豁痰湯)을 올렸다.

왕의 병세가 차도가 없자 지금까지 해 보지 않았던 모든 치료법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의관들은 담병에는 묘피(猫皮, 고양이 가죽)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권했다. 하지만 날씨가 더워지면서 묘피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음력 6월 5일, 영조는 의관들에게 “팔의 증세는 마찬가지이다. 팔에 담(痰)이 든 지 이제 여섯 달이 되는데 침이나 뜸이 효과가 없어 부항을 시험해 보고 싶다.”라고 했다. 부항은 지금까지 해보지 않는 치료법이었다.

당시 부항에는 대나무통을 이용한 것과 작은 항아리 단지를 이용한 것이 있었다. 대나무통 부항은 한쪽이 막힌 대나무통을 끓는 물에 넣었다가 뜨거울 때 꺼내서 피부에 붙이면 살이 올라왔다. 그러나 대나무통 부항은 뜨거우면 화상을 입을 수 있고, 뜨겁지 않으면 살이 올라오지 않으니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작은 항아리 부항은 안에 솜을 넣고 태워서 솜을 바로 제거하고 나서 바로 그 상태에서 피부에 붙이면 살이 올라오게 하는 것이다. 항아리 부항은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의관들은 영조의 어깨에 있는 아시혈 부위와 어깨와 팔의 혈자리에 부항을 붙였다. 어깨의 아시혈 부위의 창구(瘡口)에서는 진물과 피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

영조는 “속에 이 피고름을 쌓아 두고 있었으니 어찌 찌르듯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흐뭇해했다.

새로운 부항단지를 이용해서 3차례 부항을 하고 나서는 피고름이 묻은 부항단지는 약원 뒤뜰에 묻도록 했다. 그러나 부항도 치료에 한계가 있었다. 영조는 더운 날씨에 뜨거운 부항을 붙이는 것을 걱정했다. 게다가 자색으로 피멍이 든 피부를 볼 때마다 참혹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면 촛불 옆에서 붉게 물든 창구를 들여다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영조는 부항치료마저 거부했다.

영조가 치료를 거부했지만 의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침과 뜸, 부항치료를 하고자 했고, 처방을 변경해 가면서 올렸다. 영조는 병세에 차도가 없다고 낙담했지만 의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음력 7월 말, 무더위가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영조의 어깨 통증은 드디어 진정될 기미가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뜸이나 부항을 뜬 뒤 상처가 났던 것은 이미 아물었다. 어깨 부위가 결리는 증세가 지금은 이미 잊어버릴 만했다. 증상은 전처럼 심하지 않았고, 혼자서도 망건을 쓸 수 있었다.

영조는 43세의 나이에 오십견을 앓았던 것이다. 오십견은 보통 50대에 많이 생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30대나 40대에도 생긴다. 오십견은 하루아침에 낫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한 치료가 관건이다. 빨리 치료가 되지 않아서 낙담하는 영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던 의관들. 영조의 오십견은 자연치유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의관들의 치료가 도움이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의관들이 침뜸, 부항, 한약 이외에도 운동을 적극적으로 권했다면 어떠했을까? 오십견의 치료는 운동요법 또한 매우 중요했다. 용포를 입고 벗는 것, 망건을 쓰고 벗는 것, 심지어 세안까지 내시나 궁녀들의 도움을 받았던 왕, 운동을 멀리했던 왕의 오십견 치료는 더욱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 제목의 〇〇〇은 ‘오십견’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승정원일기>영조 13년(1737년) 2월 14일. 上曰, 頃於日次時, 欲言而忘之矣。累日前引臂着衣, 忽然作痛甚緊, 久而稍緩, 似是滯痰不消散, 則恐致支離矣。興慶曰, 左邊乎? 上曰, 左邊矣。聖徵進請按察, 上許之。聖徵曰, 常時則不痛, 而屈伸時則覺痛乎。上曰, 常有流注之痰, 着網巾, 亦未免艱辛。昔年受針內關, 其後年年, 夏間則爲之, 甲辰冬竝內關爲之, 其後似愈矣, 近又如此爾。聖徵曰, 此旣痰類, 受鍼則恐難卒然, 針不如灸矣。上曰, 灸亦何難, 而嘗疚[灸]中腕, 痕嘗在身, 每一捫之, 輒有悔心, 故欲爲無痕之鍼耳。起鵬曰, 受灸誠好, 而聖敎難之, 則姑以黃蠟饌, 暖焫, 似好矣。上曰, 頻頻脫衣, 付着似難矣。(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말하려다가 잊어버렸다. 며칠 전 팔을 들어 옷을 입는데 갑자기 통증이 몹시 심해졌다가 오랜 뒤에 조금 풀렸다. 뭉친 담이 사라지지 않은 듯하니 증세가 오랫동안 이어질까 겁난다.”하니, 김흥경이 아뢰기를, “왼쪽입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왼쪽이다.”하였다. 권성징이 나아가 진찰해 보겠다고 청하자, 상이 허여하였다. 권성징이 아뢰기를, “평상시에는 아프지 않다가 팔을 펼 때에만 아프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도 유주하는 담이 있어 망건도 간신히 쓸 수밖에 없었다. 예전 해에 내관혈에 침을 놓았는데 그 후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했고, 갑진년 겨울에도 내관혈에 침을 놓으니 그 후에는 나은 듯했다. 그런데 근래에 또 이와 같이 발병하였다.”하자, 권성징이 아뢰기를, “이것이 이미 담의 종류인 만큼 침을 놓는다고 갑자기 낫기 어려울 듯합니다. 침은 뜸만 못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뜸도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중완혈에 뜸을 뜬 적이 있는데, 흉터가 항상 몸에 남아 매번 어루만질 때마다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므로 흉터가 없는 침을 놓고 싶다.”하자, 현기붕이 아뢰기를, “뜸이 참으로 좋지만 성상께서 어렵다고 하교하셨으니 우선은 황랍병으로 따뜻하게 찜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주 옷을 벗고 붙인다면 곤란할 듯하다.”하였다.)
〇 영조 13년 4월 18일. 興慶曰, 臣情迹不安, 久未入參診筵矣。今者伏聞下政院之敎, 他不暇顧, 蒼黃入來, 而俄於藥院, 聞入侍筵臣所傳之言, 則自上, 將臨法講升座之際, 有所跌觸, 臂部至於挫閃云, 然乎? 上曰, 常談云要害處, 每易觸傷, 俄者將升龍床, 足跌於踏障, 手著於書案, 病臂遂至挫閃。蓋厥臂常時不調, 故所以大段見築, 其時痛不可忍。臨講之際, 莫知所以安臂, 置手於床, 而亦爲不便, 文義垂畢時, 稍得鎭定, 今則與前似一樣矣。(김흥경이 아뢰기를, “신은 정세가 불안하여 오래도록 진연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지금 삼가 정원에 내린 하교를 듣고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황급히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에 약원에서 입시한 연신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상께서 법강에 나아가 어좌에 오르실 때 넘어져서 부딪혀 팔에 염좌가 생겼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늘 하는 말에 ‘중요한 부위는 매번 쉽게 부딪혀 다친다.’라고 하였는데, 조금 전에 용상을 오르려다 답장에서 발을 헛디뎌 손으로 서안을 짚느라 병이 있는 팔에 염좌가 생기고 말았다. 그 팔이 평상시에 좋지 않아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을 할 때에는 팔을 편하게 할 방법을 몰라 손을 용상에 두었는데 이조차 불편하였고, 글의 뜻을 거의 다 아뢸 무렵에야 조금 진정되었는데, 지금은 이전과 같아진 듯하다.”라고 하였다.)
〇 영조 13년 4월 25일. 上曰, 前已下敎矣。非無醫藥, 而或冀針灸之有速效, 曾灸中腕·三里, 初似少豁, 厥後別無可言之效, 今番受灸, 上穴已三十九壯, 下穴亦三十壯, 而臂部運用, 一向艱澁。前則難於擧手, 今反垂手爲難, 前則妨於用前, 今反用後爲妨, 此或阿是穴誤占而然耶, 何其無效也? 雖以聖學言之, 中主實然後百體從令, 人之元氣不實, 則肢體之病, 何以自祛? 漢武不求仙而欲爲節食, 予亦欲服補中益氣湯, 果何如也? 予欲問此, 使之早入矣。(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하교하였다.
의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침과 뜸이 빠른 효과가 있을까 기대하여 일찍이 중완과 삼리에 뜸을 뜨자 처음에는 조금 시원해지는 듯하였지만 이후로는 별달리 말할 만한 효과가 없고, 이번에 상혈에 이미 39장, 하혈에도 30장의 뜸을 떴지만 팔을 움직이는 것이 계속해서 힘들다. 전에는 손을 드는 것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반대로 손을 내리는 것이 어렵고, 전에는 앞으로 뻗는 것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반대로 뒤로 뻗는 것이 불편하니, 이는 혹시 아시혈을 잘못 짚어 그러한 것인가? 어찌 그리 효과가 없는 것인가? 비록 성학으로 말해 보더라도, 마음이 신실해진 연후에야 온몸이 명령을 따르는 법이니, 사람의 원기가 실하지 않으면 온몸의 병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한 무제가 신선술을 구하지 않고서 음식을 조절하고자 하였으니, 나도 보중익기탕을 복용하고자 하는데, 과연 어떠한가? 내가 이를 묻고자 하여 일찍 들어오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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