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카 카메라와 필름

      2024.07.11 18:32   수정 : 2024.07.11 18:32기사원문
'과음하면 끊기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MZ세대는 답을 못할 수도 있다. 필름이다. 극장 영사기의 필름이 간혹 끊기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아날로그 카메라가 바늘이라면 실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로, 디지털 카메라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 됐다.

물체의 상을 맺히게 하는 사진술을 최초로 발명, 작품을 남긴 사람은 프랑스의 니엡스다. 거의 200년 전인 1827년의 일이다. 실질적인 사진 발명가는 같은 프랑스인 다게르로 보기도 한다. 노출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인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 덕에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 1세(1773~1850),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1809~1849), 폴란드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 등 19세기 중반 유명인들의 생생한 사진이 남아 있다.

더 나아가 필름을 이용하는 현대 사진의 서막을 연 사람은 영국의 탤벗이다. 탤벗이 찍은 것은 흰 부분이 검고, 검은 부분이 희게 찍히는 음화(네거티브)였다. 탤벗은 현대 사진과 비슷하게 감광 처리된 종이를 이용한 인화의 개념도 개발했다. 노출시간을 수십초로 줄였다.

유리판이나 금속판에 감광물질을 발라 사용하는 초기의 필름은 마차로 옮겨야 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이스트만 코닥(코닥) 창립자 조지 이스트만으로 투명한 셀룰로이드에 감광물질을 바른 필름을 개발했다. 그 덕에 현재의 필름과 같은 롤 형태로 사용할 수 있게 됐고 크기도 작아졌다. 1883년이었다.

코닥은 이를 기반으로 4년 후에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카메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의 휴대용 카메라는 여성의 화장품 가방만큼 컸다. 광고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림은 끝났습니다." 코닥은 1928년 세계 최초로 컬러 필름도 발명하며 카메라와 필름 산업을 지배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면서 코닥을 비롯한 전통적인 카메라와 필름은 시장에서 밀려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카'를 최초로 개발한 기업도 코닥이었다. 아날로그 카메라와 필름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코닥은 시장 붕괴를 우려해 디카를 개발해 놓고도 상품화를 미적거렸다. 그사이 일본 업체들이 디카를 내놓고 시장을 빼앗았다. 수익성이 악화된 코닥은 2012년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도 카메라가 들어왔다. 1883년 황철이 서울 안국동 자기 집 사랑채를 개조해 설치한 '촬영국'이 한국인이 연 최초의 사진관이라고 한다. 이때가 코닥이 현대식 필름을 발명한 해다. 그 필름은 아니겠지만, 사진은 상당히 일찍 들어온 셈이다. 1907년에는 서울 소공동에 '천연당'이라는 본격적인 사진관이 생겨 일반인들도 인물사진을 쉽게 찍게 됐다.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운 김규진이 연 것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라 여성 인물사진은 여성이 전담해서 찍도록 했다. 그는 어진(御眞·왕의 초상)을 촬영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카메라는 귀중품이어서 갖고 있는 가정이 드물었다. 카메라가 꼭 필요하면 사진관에서 돈을 주고 빌려 쓰기도 했다. 그래도 직접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드디어 국산 카메라가 나왔다. 1976년 대한광학에서 출시한 '코비카(KOBICA) 35 BC'라는 카메라로 박정희 대통령의 바람을 실현한 것이라고 한다(동아일보 1976년 6월 5일자·사진). KOBICA는 'Korea Binocular Camera'의 약자라고 한다.

현대칼라, 새한칼라, 코닥필름, 후지필름, 코니카필름, 이화칼라…. 이제는 가물가물해지는 필름 이름들이다. 그중에서도 새한과 현대는 양대산맥이었다. 1953년 창업한 현대칼라는 한때 400여개의 대리점에 1000여명의 직원을 둔 큰 기업이었다. 아날로그 필름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LP판처럼 복고풍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찾고 있어서다. 필름 브랜드는 코닥과 후지, 코니카 정도만 살아남았다.
'코비카'는 우리 상표고 '코니카'는 일본 상표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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