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분열과 안다는 것

      2024.07.30 18:16   수정 : 2024.07.30 21:04기사원문
생중계되는 청문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데 말을 막거나 퇴장시키는 기막힌 장면이 흔해진 요즘이다. 우리의 지식은 앎을 방해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떠해야 할까.

지식이라면, 최소한 정당화될 수 있는(Justified) 믿음(Belief)이 참(True)이어야 하는데, 게티어(1927~2021)는 그 유명한 논문 '정당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정당화되어 생긴 믿음이라도 참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정당화가 흔들리는 것에 크게 두 가지 원천이 있는데 첫 번째로, 남들이 말한 것이 실수일 수도 있고 고의성이 깔린 거짓일 수 있다.

언론사 A가 B가 사실이라고 보도했다고 하자. 여기서 B가 늘 사실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언론사 A가 B라고 말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영향력 있는 C가 소수의견 D를 비난한다고 해서 C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프로파간더에, 겉모습에, 이해관계에 약해지는 것이 인간이라면 우리의 앎은 이 취약성을 극복해야 한다.

두 번째, 인간인 내가 놓친 진실이 있을 수 있다.
알아야 하는 범위가 광대해 내가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심지어 거짓 명제로부터 연역추론을 한 명제가 참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 추론을 통해 명제 3을 발언했다고 하자. 명제 1은 "나는 재해를 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시험을 통과할 방식은 S, T 중에 S 방식이라고 들었다." 명제 2는 "S 방식은 5개의 세부지침을 가지고 있다." 명제 3은 "재해를 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시험을 통과할 방식은 5개의 세부지침을 가지고 있다"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놓친 진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T 방식이 테스트를 통과할 예정이었으며, T 방식도 5개의 세부지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추론에 사용한 명제 1이 사실과 다르지만, 명제 3은 여전히 참이 된다. 결과적으로 옳은 발언이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으며, 향후 재해예방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일상 대화에서는 정당화의 근거에 대해 말하기보다 직관, 믿음을 갖고 참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믿음의 근거를 말하자니 그 거대한 규모를 구구절절 표현할 수가 없고, 생생하게 경험한 개인 고유의 것이며, 정당화의 차원을 넘어 가슴 먹먹해지는 주제가 있는 것이다. 이때 믿음을 갖는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겉으로는 의견이 충돌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견해차라기보다 다른 경험들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종교와 정치에 대해 논쟁하지 말라는 조언이 그래서 생긴 듯한데, 이 조언을 충실히 따르면 사적인 인간관계는 보존된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배려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고의적인 거짓이 판을 치는 현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유권자의 판단은 나라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 배심원들이 현장의 목격자만큼 직접적인 지식이 없는 가운데, 변호사들의 변론을 들어보고 우연히 참된 판단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 판단은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

현대의 인지전은 인지능력을 왜곡시키고 항전의지를 꺾는 것에 맞춰져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비한 우리의 인식 역량은 충분히 강할까. 어떤 속임수에 속고 있는지, 가려진 진실은 무엇인지, 추론에 사용된 명제들은 개별적으로 탄탄한지 그리고 의견 차이 뒤에 있을 경험들의 격돌, 이해관계의 충돌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는 요즘이다.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핑계로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분열로 치달으며 공평한 발언의 기회를 막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상당히 무책임한 일이다.

이종은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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