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아무리 틀어도 30도"... 쪽방촌 주민들의 힘겨운 여름나기

      2024.08.14 11:10   수정 : 2024.08.19 13:17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에어컨이 없으니 어떡해. 선풍기밖에 없어"
한평(3.3㎡) 남짓한 정사각형의 방. 52세 백창기씨는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에 위치한 이 작은 방에서 선풍기 한대로 올여름을 버티고 있었다. 바람이 백씨 몸에 닿을 뿐 30도가 훌쩍 넘는 방의 온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입추가 지났지만 찜통더위가 한동안 더 이어질 기세다.

밤에는 1907년 이후 두번째로 긴 열대야가 24일째 이어지고 있다. 예상대로라면 올해 역대 최장인 26일 기록도 깰 전망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방에 냉방기와 환기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폭염에 그대로 노출된 채 지내고 있었다.

선풍기에 의지한 여름나기
14일 영등포 쪽방촌에서 만난 백씨는 선풍기 한대에 의지해 여름을 버텨내고 있다고 했다. 집주인이 건물에 에어컨을 설치했지만 한층에 한대씩, 4층 건물에 총 4대가 전부다. 한층에는 11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에어컨에서 멀어질수록 시원한 바람과는 멀어지는 구조였다. 백씨의 방에서는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백씨는 "복도 끝에 에어컨이 있지만 내 방까지 바람이 오지는 않는다"며 "선풍기를 돌려도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백씨의 방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빨래도 실내에서 말리고 있었다. 건조대 없이 선반 위에 각목을 놓고 옷걸이로 세탁물들을 걸어 놨다. 습도가 높은 날씨가 이어지는 상황에 빨래까지 실내에서 건조해 방안은 습도에 의한 끈적함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창문까지 열지 못하고 있었다.

백씨는 "모기장도 없고 도둑도 들어서 이 좁은 방에서 창문을 열지도 못한다"며 "너무 더워서 물을 죄다 얼려두고 쓴다"고 했다.

인근 고시원 주민 오희성씨(67)에게도 여름은 버티기 힘든 계절이다. 한평 남짓한 넓이의 오씨 방에는 에어컨이 없다. 방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열을 식히고 있었다. 오씨는 "평소 30도까지 온도가 올라간다"며 "벌레가 나오고 좁아서 도저히 밤에는 견디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도보 15분 떨어진 '밤더위대피소'
쪽방촌이나 인근 고시원 주민들은 그나마 밤이 반갑다고 했다. '밤더위 대피소'를 찾아갈 수 있어서다.

밤더위 대피소는 수면실이 있는 사우나 등을 서울시가 지정하고 지원한다. 쪽방촌 주민들은 쪽방촌 상담소에서 서울시가 지원하는 이용권을 받아 지정된 사우나의 수면실에서 잘 수 있다. 1인당 하루 1회 이용권이 나온다. 상담소에 따르면 쪽방촌 주민과 인근 고시원 주민을 통틀어 하루 평균 25~30명이 이용권을 받아 간다. 지난해 8~10명씩 받아 간 데 비해 폭염과 홍보의 영향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 13일 밤 찾은 서울 영등포구 밤더위 대피소인 동남사우나의 온도는 25.4도로 서늘했다. 수면실에서는 쪽방촌 주민을 비롯한 주민 9명이 서늘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했다.

백씨는 "지난달 24일께부터 이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대피소에서 자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8시가 되자 불이 꺼졌고 조용한 TV 소리가 선풍기 소리에 섞여 자장가처럼 들렸다. 주민들은 하나둘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문제는 다시 날이 밝으면 시작됐다. 아침부터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가 시작되는데 더위를 피할 수 없는 쪽방촌의 방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밤더위 대피소는 쪽방촌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오가는 길에 더위로 지치기 일쑤다.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거나 할 경우 더워도 집에서 버티는 주민들도 많다고 한다.
정운덕 쪽방촌상담소 활동가는 "'씻고 나와도 걸어오면서 또 땀이 난다'며 안 가는 분도 있다"고 했다.

yesyj@fnnews.com 노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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